6~7세기 부여지역 백제 횡혈식석실묘의 시·공간적 분포 연구 [韩语论文]

资料分类免费韩语论文 责任编辑:金一助教更新时间:2017-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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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에서의 6∼7세기대는 웅진기 말과 사비기 전체를 아우르는 시간으로, 선진문화가 활발하게 수입되고 그로 인해 사회 전반에 변화가 일어나던 시기이다. 그런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

백제에서의 6∼7세기대는 웅진기 말과 사비기 전체를 아우르는 시간으로, 선진문화가 활발하게 수입되고 그로 인해 사회 전반에 변화가 일어나던 시기이다. 그런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고고학적 자료로는 사비도성과 횡혈식석실묘가 대표적이다. 특히 사비기 이후로는 경외매장 관념이 도입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의 중심묘제인 횡혈식석실묘의 변화양상과 분포에 대한 검토를 통해 사비도성 외연 지역의 일면까지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다수의 선행연구에서 사비기 석실묘에 대한 편년연구나 부여지역의 특정 고분군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 바 있으나, 대체로 통시적인 관점에서 진행되어 형식분류와 편년의 세밀함이 다소 떨어진다. 또 신규 조사자료의 양이 늘어난 만큼 이에 대한 검토 역시 필요하다. 사비도성이 위치한 현재의 부여지역에서는 34개소의 고분유적이 발굴조사되었다. 각 유적이 분포하는 양상을 살펴본 결과, 다수의 유적이 도성에서 4km 내외의 거리에 밀집분포하고 나머지 소수의 유적은 산발적으로 분포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에 도성에서 4km 이내의 거리에 위치한 고분유적들을 도성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묘역으로 설정하여 총 13개소의 유적을 선별하였다. 13개소의 유적에서 확인된 6∼7세기대 횡혈식석실묘 중에서 각 세부구조의 잔존상태가 양호한 116기의 석실을 선별하여 검토대상으로 삼았다. 개별석실의 분석에 있어서는 위계성보다는 시간성을 강하게 반영하는 속성들을 기준으로 형식분류를 실시하였는데, 연도의 접속위치와 현문구조 및 문틀부재의 수량과 문주석의 돌출정도에 따라 형식을 설정하였다. Ⅰ유형은 현실의 중앙에 연도가 접속해 있으며, 개구식 현문인 ⅠA형식과 문틀식 현문인 ⅠB형식으로 구분된다. ⅠB형식은 문지방석의 존재여부에 따라 다시 ⅠB-①형식과 아류형인 ⅠB-①‘형식으로 세분화된다. Ⅰ유형에 해당하는 석실들은 최상위 계층의 묘역에서 주로 조영되고 있으며, 공주의 무령왕릉과 익산의 쌍릉 등을 통해 볼 때 웅진말에서 사비기 전시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Ⅱ유형은 연도가 현실의 한쪽 측벽으로 치우쳐 접속하고 있는 형태로 개구식 현문인 ⅡA형식과 문틀식인 ⅡB형식으로 구분된다. ⅡB형식은 문틀부재의 수량과 문주석의 돌출여부에 따라 ⅡB-①∼ⅡB-④형식과 그 아류형으로 분류된다. Ⅱ유형은 가장 많은 수량이 확인되었으며, 다양한 변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출토유물과 석실의 구조를 검토한 결과, 일련의 Ⅱ유형 석실은 6세기 전반에서 7세기 전반까지의 기간에 걸쳐 조영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Ⅲ유형은 현실의 측벽과 연도의 측벽이 나란하게 조성되어 있으며, 연도가 매우 짧은 형태이다. 부재의 수량이나 문주석의 돌출도에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문틀식의 현문구조를 지닌다. 또한 Ⅰ·Ⅱ유형에 비하여 현격하게 규모가 소형화되고, 구조가 간략화 되는 양상이 나타난다. 시기를 상정할 수 있는 유물이 출토되는 사례는 없었으나, 단장이 의도된 규모와 구조로 보아 7세기대 이후를 중심으로 조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으로는 위와 같은 편년안에 기초하여 각 유형별 석실들의 시·공간적 분포양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먼저, 6∼7세기대의 백제는 사회변화를 수반하는 역사적 사건을 고려하여 크게 3개의 단계로 분기를 설정할 수 있으며, 시간적 단계에 따라 석실의 형식들이 변화하는 양상이 나타난다. 대체로 최상위 계층에서 선호하였던 Ⅰ유형을 제외한 나머지 석실들은 Ⅱ유형에서 Ⅲ유형으로 이어지는 큰 흐름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각 단계에서 나타났던 역사적 사건이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먼저, 1단계는 무령왕의 재위에서부터 성왕의 사망에 이르는 시점인 6세기 전반에서 6세기 중반까지로, 정치·사회적으로는 정쟁을 수습하고 왕권이 강화되던 시기로 다양한 선진문물의 수입을 통해 전축분이 도입되었고 이를 모방한 석실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이 단계에서는 개구식 현문시설이나, 문주석의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현문을 가진 ⅡA, ⅡB-①, ⅡB-①’형식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2단계는 위덕왕 즉위에서 법왕대까지로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전반까지에 이르는 기간으로 성왕의 관산성 전투 패사 등으로 인해 이전단계에 비해 왕권이 실추되고 귀족권이 상대적으로 강화되는 시기이다. 강화된 귀족의 영향력과 귀족문화의 성행이 맞물려 석실의 사용계층이 확대되고 다양한 형식으로 조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 단계에는 ⅡB-②, ⅡB-②’, ⅡB-②“, ⅡB-③, ⅡB-④, ⅡB-④’형식 등 가장 다양한 형식의 석실들이 등장하였다. 3단계는 무왕 즉위에서 백제멸망까지의 기간으로 7세기 전반에서 7세기중후반까지의 기간에 해당하며, 무왕대에는 익산경영을 실시하고 신라를 공략하는 등 다시 한 번 중흥기를 구가하던 시기다. 약진하던 정치·사회적 분위기에 비해 이 단계에 등장하는 석실들은 앞선 단계에서 조영된 석실들에 비하여 현격하게 소형화·간략화되어 ⅢB-①, ⅢB-②, ⅢB-③, ⅢB-④형식이 조영되었다. 이러한 석실의 소형화·간략화와 관련하여 무왕대의 사적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7세기 전반의 무왕대에 도성 내에 홍수가 일어났음을 언급하는 기사가 확인된다. 구아리와 관북리 등지에서 조사된 유적에서 시기적으로 유관한 홍수퇴적층이 확인되어 사적사건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동남리 일원을 중심으로 조사된 유적에서는 도시공간의 확장을 위해 대지를 조성한 흔적이 확인되었고, 대지조성시기 역시 홍수이후 조성된 백제문화층과 시기적으로 상통하고 있다. 이러한 사적사건과 고고학적 자료들로 보았을 때, 부여지역의 횡혈식석실묘가 일련의 ⅢB형식으로 변화하게 되는 배경에는 현안사업인 도시공간의 복구와 확장사업에 대한 사회적 재원의 집중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부역지역 횡혈식 석실묘의 공간적 전개 양상을 살펴보면, 묘역이 사비도성의 외연지역을 따라 밀집한 양상을 보이고 있어 도성근린밀집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비도성 주변의 묘역은 대체적으로 산지 혹은 구릉성 지형이 발달해있는 지역에 입지하고 있다. 또한 그 공간분포에 있어서, 도성을 기준으로 동쪽, 서쪽, 남쪽 등 모두 3곳에 집중되어있다. 이와 관련하여 최상위 계층이 선호하였던 1유형의 석실은 동쪽 묘역에서만 확인되었으나, 나머지 유형은 모든 묘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반면 상대적인 조성시기차이를 반영하는 Ⅱ유형과 Ⅲ유형의 비율을 살펴보면, 세 곳의 묘역에서 비슷한 비율로 조영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는 각 묘역이 동일한 시간의 폭 내에서 조성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동일한 조영시기의 폭과 서로 대응되는 위계차이의 양상으로 보았을 때, 사비도성의 축조단계에서 도성내부 공간에 대한 계획뿐만 아니라, 외연지역의 묘역배치에 대한 고려도 작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즉, 사비도성은 도성 내·외부의 공간에 대한 종합적 계획 하에 조성한 계획도시라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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