植民地朝鮮における怪談の硏究 [韩语论文]

资料分类免费韩语论文 责任编辑:金一助教更新时间:2017-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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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은 ‘괴물’이나 ‘유령’이 나오는 무서운 이야기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상을 잊게 해주는 오락물로써 사랑 받아왔다. 그러나 괴담이 ‘유령이 등장하는 무서운 이야기’라는 인...

괴담은 ‘괴물’이나 ‘유령’이 나오는 무서운 이야기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상을 잊게 해주는 오락물로써 사랑 받아왔다. 그러나 괴담이 ‘유령이 등장하는 무서운 이야기’라는 인식은 처음부터 존재하였던 것이 아니라 민족 문화와 교섭하면서 정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의 괴담 문학은 중국의 전기소설(伝奇小説)을 수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으로 전해진 중국의 전기소설은 에도시대를 거쳐 일본 특유의 문화 형식과 교섭하면서「요쓰야 괴담(四谷怪談)」,「보탄도로(牡丹灯籠)」,「반조 사라야시키(番町皿屋敷)」등의 전통적인 일본 괴담을 만들어왔다.  본 논문은 이러한 괴담의 수용과 변용의 양상을 일본과 조선의 문화가 공존하고 있었던 식민지 조선이라는 공간 속에서 고찰한 것이다. 오락적 문예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괴담은 식민지라는 정치적 공간에서도 재조일본인에 의해 회자되고 있었다. 그들이 창작한 괴담은 일본어잡지의 문예란을 통해 식민지에서의 답답한 마음을 풀어주는 오락물로서의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괴담은 조선 왕조의 황후인 민비가 미신적인 인물로 묘사되는 등 재조일본인이 가지고 있었던 문명론적 인식이 개입되어 있었다. 따라서 재조일본인에 의한 괴담은 조선 민중들과 공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인 공동체를 위한 오락이었다. 이러한 재조일본인 잡지 속의 괴담물에는 조선의 문화와 사람은 배경에 불과한 것이었는데, 이는 당시 식민지의 상황이 반영된 것이었다. 한일합방을 맞이한 조선에서는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조선어신문인『매일신보(毎日申報)』가 발행되었다. 조선에서 ‘괴담'이라는 단어의 쓰임을 병합 이전의 조선어신문과『매일신보』에서 찾아보면, 당시 ‘괴담'이라는 용어는 “근거 없는 허구”, "이상한 이야기"로 무서운 귀신 이야기와는 관계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괴담'의 의미가 점차 무서운 이야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변용해간 것은 1910년대 이후로, 이는 총독부 기관지라는 매체 속에 내포 된 일본의 문화 의식과 관련되어 있었다. 재조일본인 잡지 속 괴담이 공동체 내에서의 오락물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총독부의 기관지『경성일보』와『매일신보』에서는 적극적으로 조선의 옛날이야기를 모티브로 괴담이 만들어져 조선과 일본의 괴담 문화가 교섭하는 공간이 생겨나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27년 여름에는『매일신보』에 대량의 '괴담' 시리즈가 연재되었다. 전설, 구비, 민담을 바탕으로 한 조선의 괴담은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친숙한 것이었다. 그러나 귀신과 도깨비 이야기를 괴담이라는 제목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 여름과 괴담을 묶는 취향 등은 일본의 괴담 문화 양상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었는데 이는 괴담의 저자가 주로 일본 유학 체험을 가진 신문기자였다는 점이 크게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조선에 오래 전해지는 귀신이나 도깨비 이야기는 친숙하게 민중을 끌어들이는 기능과 동시에 조선의 민중 독자층을 획득하여 총독부가 의도하는 정치적 논조를 더 넓게 발신하려는 의도성 또한 가지고 있었다.  한편『경성일보(京城日報)』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조선색'이 강조된 이국적인 괴담이「괴문록(怪聞錄)」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다. 식민지의 미신 타파를 하나의 목표로 가지고 있었던 총독부는 전근대적인 이미지를 가진 ‘괴담'이라는 말을 일본어 신문에서 사용하는 것에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한편 이 괴담 연재물들은 여름을 즐길 오락적 읽을거리로 같은 모체를 가진『경성일보』와『매일일보』에 각각 일본어판과 한국어판으로 연재된 것을 알 수 있다. 1927년을 경계로 조선의 전설 연구가 활성화되었지만 일본인은 이를 내선융화, 조선인은 민족의 근간을 지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등 각각 다른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조선의 역사와 신화에 눈에 보이지 않는 조선인의 심성이 깃들어 있다고 주장한 최남선은「단군론」에서 조선 전설 설화 연구에 박차를 가해야하고 특히 설화 연구 영역에서는 괴담에 주목하고 있었다. 1920년대 전반 이후『경성일보』에는『매일신보』같은 괴담 특집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신문지면에서는 강담 잡지의 괴담 특별호가 자주 광고되었으며, ‘그로테스크'한 괴물의 삽화는 괴담의 이미지를 직접 조선 사회에 발신하고 있었다. 경성 시내에서는 여름이 되면 괴담 영화가 상영되어 총독부 도서관에는 1920년대의 괴담 붐과 함께 출판된 일본의 괴담 책이 비치되어 있었다. 일본에서 직접 유입해온 대중오락으로서의 괴담은 신문지면에서 발신된 괴담 칼럼으로는 전해지지 않는 괴담의 무서움과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조선에 전달하였다.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과 조선의 괴담 교섭은 주로 신문과 일본에서의 괴담 서적, 그리고 영화를 통해 이루어져 갔다. 이러한 교섭은 1930년대 조선의 오락물에 흡수되어『매일신보』의 지면에서도 민족의 오리지널리티을 강조하는 괴담이 나타나게 되었다. 조선의 야담(野談)과 결합된 이러한 괴담은 일본 괴담의 형식을 본뜨고 있었으나, 1927년의 ‘괴담'시리즈 속 유령과 도깨비 이야기와는 동떨어져 있었다. 1920년대의 대중오락 문화의 흐름은 현대 조선 사회의 괴담이 ‘그로테스크'하고 무서운 이야기임을 인식시키는 동시에, 유령 이야기나 도깨비는 전근대적인 것으로 상대화시켜 버렸다. 이와 함께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하고자하는 대중의 욕망은 민족의 오리지널리티을 호소하는 야담운동과 융합해 괴담을 번성시켜 갔다.『매일신보』에 보이는 야담과 엮인 괴담은 대중에게 말을 거는 ‘강담(講談)’의 형식을 취하며 조선 고유의 괴담 영역을 획득하였다고 할 수 있다. 재조일본인 잡지와 총독부의 기관 신문에는 ‘노목(老木)의 재앙'에 얽힌 이야기가 괴담으로 자주 등장하였다. 이 노목은 조선의 근대화, 일본의 식민통치로 인한 사회의 변화, 그리고 눈부신 발전의 일로를 걷는 근대화의 뒷면에 부각된 ‘조선의 성역(聖域)'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노목의 재앙'은 조선 땅에서 지켜져 온 민중 신앙에 침입하는 외부에 대한 대항의 단면이었다. 일약 일상생활에서 일탈한 옛날이야기처럼 보이는 괴담이나 전설도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는 모두가 공유하는 가장 현실적인 새로운 이야기 장르였던 것이다.  식민지라는 정치적 공간 속에서 ‘괴담’이라는 오락적인 이야기의 생산과 소비는 단순한 유희라고는 볼 수 없는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식민자와 피식민자들, 일본어와 조선어, 일본인과 조선인이라는 양극의 요소가 부딪치는 식민지 공간 속에서 괴담은 각각의 입각점이 만들어내는 융합과 교섭에 의해 생산되었다. 이러한 괴담들은 ‘내지'의 괴담과 상반되는 양상을 가진 식민지 특유의 ‘과경(跨境)'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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