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가 논구 대상으로 원교의 서예를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원교를 통해, ‘서예는 인생 그 자체’란 말의 진위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서예가들은 ‘서예는 인생 그 자체’라는 말... 본고가 논구 대상으로 원교의 서예를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원교를 통해, ‘서예는 인생 그 자체’란 말의 진위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서예가들은 ‘서예는 인생 그 자체’라는 말을 즐겨 한다. 그러나 왜 그런가 하는 초보적 물음 앞에서는, 그저 예술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며 성역화 해버리거나, 주저하며 회피해 버리기 일쑤다. 원교의 서는 범인은 상상할 수 없는 피눈물로 삼킨 삶속에서 발화했고 또한 서론을 남겼기 때문에, 이에 대한 논구 대상으로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만일 그의 삶과 서예를 결합해 무리 없이 논할 수 있다면, ‘서예는 인생 그 자체’라는 말을 증명하는 셈이라고 본 것이다. 둘째 서예가들의 자기모순에 아랑곳 않는 태도 때문이다. 서예가들은 ‘서예는 정신의 표현’이라거나 ‘서예는 학문과 분리될 수 없다’라고 주장하기 일쑤다. 그러나 그 ‘정신’이란 무엇인가를 鑽究하거나, 학문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에 대해서는 정작 사차원적 인간 취급을 한다. 서예가의 이러한 모순적 태도는, 원교에 대한 추사 비평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서예가들은 추사와 더불어 원교를 대표서가로 지목하면서도, 원교를 열등하게 취급한다. 원교를 열등하게 인식하는 까닭은 추사의 원교에 대한 비평 때문인데, 서예가들은 이를 고증학적 우위를 점한 추사의 비평이라고 인식한다. 필자는 이를 虛像이라 보았다. 원교는 아침이슬처럼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신세에도 서결을 저술했다. 서결은 조선서예이론의 획기적 전기를 마련했다. 추사는 비록 원교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가했으나, 이는 오히려 원교의 서예를 조선 문예의 주역으로 끌어 올린 계기가 되었다. 원교에 대한 추사의 비평으로 인해, 조선 문예는 ‘文以載道’에서 ‘文道分離’로 변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추사의 원교비평은 우리 문화의 自內적 다이내믹을 보여주는, 건강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 추사의 원교비평을 자내적 요인이 아닌, 自外적 요인에 의한 것으로 해석되면서 심히 왜곡되어 왔다. 이는 서구적 근대가치를 우위에 두는 문예연구에 기인한 것으로, 원교에 대한 추사비평을 우리전통과 서구가치의 충돌로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17-8, 9세기의 문예연구는 청조의 ‘考證學’이 도래하면서 조선의 기존문예를 전복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원교에 대한 추사비평은 이러한 양상을 보여주는 직접적 근거가 되어왔다. 우리는 원교에 대한 추사비평을, 원교가 서의 근본으로 왕희지서를 삼자는 것에 대해 당시 국제무대(淸朝)를 휩쓴 고증학적 ‘북비남첩론’에 입각해 왕희지서가 僞作임을 밝힌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으로 원교와 추사의 우열론을 삼아 왔으며, 이것으로 원교의 낡은 서론에 대한 고증학적 우위의 추사의 비평이라고 운운해왔던 것이다. 이에 대해 본고는 원교에 대한 추사의 비평에는, 추사의 서의 패러곤으로서 왕희지라 해도 위작은 불가하다는 것과, 원교의 위작이라도 여러 방법을 통해 연찬하면 가하다는 측면의 대립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예컨대 주자학적 ‘격물치지’를 근간으로 하는 추사와, 양명학적 ‘치양지’를 근간으로 하는 원교의 충돌로 해석할 여지가 있으며, 따라서 원교와 추사의 비평은 외적 요인에 의한 전통의 전복이 아니라, 우리 내부의 역동적 측면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북비남첩론은 비록 고증학적 기풍에서 진작된 이론이지만 고증학과는 엄연히 다른 호불호가 개입된 이론이라는 점, 고증학은 추사에 이르러 갑자기 도래한 학문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 원교에 대한 추사비평을 두고 고증학적 우위 운운하는 것은 허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서구적 근대가치를 우위에 두는 문예연구가 옳은가, 그른가 하는 문제는 필자의 관심사가 아니다. 따라서 원교에 대한 추사비평이 고증학 우위를 보여주는 문예사적 근거인가 아닌가하는 것도 필자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나 필자가 이를 문제시하는 까닭은, 원교에 대한 추사의 비평을 바라보는 현서예가의 모순 때문이다. 그 존폐가 걱정스러운 서예가들은 자신의 모순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예를 동양예술의 정수라고 말하며, 대중의 무관심을 한탄한다. 지금의 서예가 중 ‘懸腕도 모르고 用筆 · 用墨도 구별치 못하고서 원교의 筆名이 세상을 뒤흔들었다’는 추사의 비평을 신봉하지 않는 서예가는 드물다. 그러나 현완도 모르고 용필 · 용묵도 구별치 못하고서 필명을 날릴 수 있다고 믿는 서예가 또한 드물다. 현완도, 용필 · 용묵도 구별치 못하고서 필명을 날릴 수 있었던 것이 서예라면, 그것을 과연 동양예술의 정수라고 운운할 만한 것인가? 서예가들은 이러한 원교에 대한 추사비평의 모순을 고증학이라는 권위 앞에서 눈감아 버린다. 우리가 고증학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객관적 실증을 중시하는 합리성 때문이다. 이제는 고증학적 우열론을, 고증학적 태도로 바라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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