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은 1443년(세종25) 12월에 창제된 우리겨레의 고유문자다. 글자의 정식 이름은 「訓民正音」이지만, 훈민정음이 창제된 무렵부터 ‘언문’ 또는 ‘정음’ 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다. ...
훈민정음은 1443년(세종25) 12월에 창제된 우리겨레의 고유문자다. 글자의 정식 이름은 「訓民正音」이지만, 훈민정음이 창제된 무렵부터 ‘언문’ 또는 ‘정음’ 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다. 16세기경부터는 ‘한글’의 표음 방식이 중국의 반절법과 한글을 ‘반절’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모음글자와 자음 글을 결합시켜 ‘가갸거겨고교구규그기ᄀᆞ 나냐너녀……(이하 생략)’와 같은 ‘반절표’가 20세기 초까지 쓰기도 하였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국어와 국문에 대한 자각과 애호열이 높아지자 「훈민정음」을 낮게 일컬어 ‘언문’이라고 하던 이림을 버리고 ‘위대한 글자’라는 뜻으로 ‘한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 한글 대신 개화기부터 ‘국문’이라고 불러 오늘날까지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런데 ‘한글’ 이라는 이름이 순전히 ‘글자’만을 가리키는 것인지 한글로 표기된 한국어까지 가리키는 것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글자만을 뜻하는 ‘한글’이라고 하는 사람과 ‘글자’와 한국어를 다 나타내는 뜻으로 ‘한글’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국문’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만찬가지다
곧 한글은 오늘날 우리나라 문자 생활의 주역을 담당하고 있다. 의무 교육에서는 완전하게 학습하도록 지도하고 있으며 거기에 쓰이는 모든 교과서는 한글로만 되어 있다. 모든 공문과 법령은 한글로 쓰도록 법으로 규정 되어 있다. 일반사회에서 발간되는 각종 간행물의 대부분도 한글로 되어있다. 한자가 혼용 되기도 하지만, 한글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적게 나타난다. 그 한자조차 줄어드는 추세에 있다. 한글 중심의 문자생활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1세기 전인 1894년의 갑오경장을 계기로 시작된 일이다. 그 이전에는 한자가 문자 생활의 주역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대부들은 한자부터 배워야했었다.
그러나 필자 생각으로는 한자를 전혀 외면하지 말고 우선 한글로 쓰고 하자를 괄호 안에 집어넣음으로써 우리 후손들이 낱말의 뜻도 알기 쉽고, 한문도 쉽게 익히게 되는 동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모음은 천, 지, 인을 자음은 발음 기관을 본뜬 것을 더구나 15세기에 창안했다는 것은 놀라운 뿐이다. 훈민정음의 고유하고 독창적인 문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세계적인 언어 학자들이 한글의 창제 이론의 과학성과 창제 원리의 합리성 및 우수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훈민정음은 비록 15세기에 만들어 졌지만 이미 20세기의 언어학 이론원리를 모두 담고 있을 만큼 시대를 앞선 우수한 문자이다.
사대부들은 언문창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국가에서나 지방관아 또는 사찰과, 민간에서 사백여년 동안 훈민정음을 언해해 보급해 민족의 혼, 훈민정음의 명맥을 이어왔었다. 세종대황은 백성을 사랑하시어 모든 백성9주로 하층민을 포함한)이 문자 생활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하기위해 한글을 만드셨다. 한굴문자는 당시 중국 한자음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말을 표기 할 수 있는 세계적인 보편문자(universal letters)라는 점에서는 그 어떤 문자보다 실용적인 문자다.
'훈민정음해례본' 예의편(본문) 첫머리에 나오는 세종대왕의 서문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 말소리가 중국과 달라서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한자교육을 받지 않은) 일반 백성들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펼 수 없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내가(세종대왕) 이를 딱하게 여기고 새로 스믈여덟 글자를 만들었는데,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 나날이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애민 사상이 깊은 세종대왕은 이 밖에 한글 창제무렵의 전승 한자음이 상당한 혼란 상태에 있다고 생학하고, 이를 바로잡을 사업을 진행시키었다.
이사업이 東國正韻(1447)이라는 운서 편찬으로 결실을 맺었는데, 이 개정 한자음을 제대로 표기하기 위해서도 표음문자가 필요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東國正韻은 훈민정음 창제원리 및 背景 연구에 유일무이한 귀중한 史料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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