茨木のり子の詩における思想探讨 : 「反戦詩」・「反侵略詩」を中心に [韩语论文]

资料分类免费韩语论文 责任编辑:金一助教更新时间:2017-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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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바라기 노리코 (茨木のり子 1926~2006)는 일본 전후시의 대표적 여류시인이다. 일본 현대시의 장녀라고도 불리고 있다. 이바라기는 1926년에 일본의 아이치(愛知)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바라기 노리코 (茨木のり子 1926~2006)는 일본 전후시의 대표적 여류시인이다. 일본 현대시의 장녀라고도 불리고 있다.
이바라기는 1926년에 일본의 아이치(愛知)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미야자키 히로시(宮崎洪)는 의사이고 병원의 부원장을 지냈고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다. 어렸을 때부터 이바라기는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다. 의사로서의 「침착함」, 「객관성」, 또 약자에 대한 자비심 절대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 등이다.
이바라기가 태어난 쇼와(昭和) 시대는 군국주의가 시작 되었고 12세 때는 일중(日中) 전쟁이 시작 되어서 이바라기는 군국 주의의 세뇌교육을 많이 받았으며 16세때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시절에서는 완벽한 「군국 소녀」가 되었다.
그러나 전쟁 중의 어두운 시대의 고통,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고민, 죽음의식, 청춘의 상실 등의 고통 끝에 패전을 맞이하였다.
패전과 더불어 모든 가치관의 전환으로 인하여 지금까지 의 모든 것이 헛된 것이 되었다고 깨달아서 이바라기의 분노와 절망과 슬픔이 오히려 「쓰고 싶어 하는 」 힘이 되었다.
25세때 부터 시를 쓰기 시작 했는데 이바라기가 시인으로서 크나큰 영향을 받은 사람은 바로 가네코 미쓰하루 (金子光晴) 이다. 이바라기는 가네코 미쓰하루부터 진실을 판단 하는 사고와 눈을 가져야 하는 것을 배워서 그 후 이바라기 시의 정신지주가 되었다.
1953년 가와사키 히로시 (川崎洋) 와 함께 동인지 「櫂」를 창간하게 되어서 이바라기의 본격적인 시 활동이 시작 된다.
본고의 전반 에서는 「반전시」를 중심으로 분석 고찰 했다. 이바라기의 시 세계는 전쟁 때문에 심상으로 나타내지 못했던 억눌린 마음의 대화 (독백)부터 시작 되어서 자신의 전쟁 경험에 대한 절망 분노 슬픔 그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출발 하려고 하는 결심으로 변화 된다. 그리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희생 된 모든 사람들에 대한 슬픔, 분노 그리고 사죄 까지에 이른다. 그리고 그것은 국가 천황에 대한 전쟁 책임에 대한 추구에 까지 이른다.
후반 에서는 「반 침략시」 를 중심으로 분석 고찰 했다. 여기서는 일본이 아시아의 침략 이라는 넓은 시야에서 시를 통해서 특히 중국과 조선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 분노 보다는 깊은 슬픔과 사죄의 마음을 강조 하고 있다.
일본의 침략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전후 처리에 대한 분노와 일본의 태도의 애매함에 대한 모순과 실망이 느껴진다. 이바라기는 그냥 과거의 침략을 규탄 하는 것이 아니라 늘 현재 문제로서 일본 전후의 「사죄문제」,「보상 문제」,「천황의 전쟁 책임」등을 시를 통해서 싸워 왔던 것이다.
그것은 처음에는 국가나 천황 책임 문제로 쓰여 있지만 결국은 국가나 천황을 움직이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군중의 힘을 알게 되어서 생각지도 못한 이상함과 모순을 느껴 예리하게 추구 하고 있다.
그리고 이바라기는 국가나 군중에 대한 실망으로 인하여 「혼자서 하는 사죄」를 시작 하게 된다. 그것은 「이웃 말의 숲(隣国語の森) 」에 나오는 「용서 하십시오」 라는 한 말에 함축 되어 있다. 최종적으로 이바라기는 「혼자서 하는 사죄」를 시를 통해서 계속 하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된다. 윤동주와의 대화 속에서도 이바라기가 대화를 통해서 「사죄」를 하는 것으로 인하여 자신의 무거운 짐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려고 하는 시도가 느껴진다.
「반전시」를 요약하면 「독백에 의한 대화」,「절망과 재생」,「동포에 대한 위로」,「진실의 추구」, 「천황과 일본인의 애매함」 을 중심으로 쓰고 있다.
「반 침략시」를 요약하면 「일본의 침략에 대한 분노와 슬픔」,「과거의 침략과 보상 문제」,「인간 차별의 본질」,「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분노와 회한」,「개인의 사죄」를 중심으로 쓰고 있다.
결론적으로는 이바라기의 「사죄」,「보상 문제」 는 개인적인 「피해자」부터 일본 민족으로서의 「가해자」로 이행되어 「천황 책임」,「국가의 책임」의 추구까지 미치지만 그 배후에 「일본 민족의 의식에 대한 문제」라는 모순에 부딪친다. 군중이 지지하는 천황제가 없어지지 않는 한 일본 보상 문제도 사죄 문제도 해결 할 길은 없다 라는 한계에 부딪치는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혼자서 하는 사죄」에 이른다. 「시」라는 매체를 통해서 평생 이바라기의 「사죄」는 계속 되어 왔다.
이바라기의 사죄의 원점에는 이바라기 자신이 겪어 왔던 「아픔」,「절망」이 있고 그것을 공유한 사람들에 대해서 혹은 더 간절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공유」가 「사죄」로 변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혼자서 하는 사죄」로 인하여 자신의 마음이 구원 되어 지기를 빌고 있었다고도 말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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