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의 연구 범위는 1930년대를 전후로 오지호(吳之湖, 1905∼1982)가 향토색 이론을 발전시켰던 초기 작업들로 국한시켰다. 연구 방법은 선행연구들에서 주장되어 온 다양한 관점을 살펴보... 본 논문의 연구 범위는 1930년대를 전후로 오지호(吳之湖, 1905∼1982)가 향토색 이론을 발전시켰던 초기 작업들로 국한시켰다. 연구 방법은 선행연구들에서 주장되어 온 다양한 관점을 살펴보고, 이들이 제기한 논의점을 1930년대 오지호의 작품 및 조형이론들에 대입시켜 분석한다. 또한 오지호와 동시대 활동했던 김주경(金周經, 1902∼1981) 및 윤희순(尹喜淳, 1902∼1947)의 조형이론을 살펴보고 20세기 후반 선행연구들을 조형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으로 나누어 고찰한다. 선행 연구 논의로는 오지호 작품을 평가하는데 키워드로 ‘향토색’의 개념과 이제까지의 논점을 고찰한다. 조선의 초창기 미술 이론가 윤희순은『조선 미술사 연구』(초판 1946)에서 ‘조선의 민족성’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학술적인 측면에서 20세기 초반부터 향토색에 대해서는 다양한 논의가 분분하다. 민중예술론과 관련해서 정치적 맥락에 주목한 박계리의『모더니티와 전통론』(혜안출판사, 2014),「일제시대 ‘조선 향토색’」(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1996) 저서와 논문을 중심으로 고찰한다.(Ⅰ장) 1930년대의 향토색 논의의 몇 가지 쟁점들을 살펴보면,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에 대한 반발의 움직임을 본격화했던 주체는 역설적이게도 일본 유학파 출신의 우리나라 화가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순수주의를 주장하고 미학적 가치를 중요시했던 부류와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을 위한 조선 향토색의 가치를 주장했던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박계리는 향토색 개념의 유래로 19세기 유럽 사회주의 사상과 향토색의 연관성을 설명했다. 향토색은 독일에서 19세기 말 벌어졌던 향토예술 ‘하이마트 쿤스트’ (Heimatkunst)에서 온 용어이며 1906년경 일본문단에서 쓰이다가 일제시대 한국으로 수입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카프(KAPF)와 향토예술 이론의 대립에서 ‘조선 향토색’이 논의되었고, 1935년 이후 프로 미술론(프롤레타리아 미술론)을 주창하던 화가군의 역량도 쇠락하여 향토색 추구는 순수미술론이라는 커다란 테두리 안에 진행되었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1930년대 프로 미술론을 주창한 전미력은 조선미술계의 주요 흐름을 알고 있고 오지호에 대해 민족적 경향의 조선 풍경과 동양정신을 강조하는 계열이라고 파악했다. 1920년대 말 미술계는 일제 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조선 향토색 개념을 강조하였는데 민족적 소재와 이국취향의 화풍을 선전의 심사기준으로 부각시켰다. 이 시대 윤희순은 선전의 심사기준이 ‘편협한 관념으로서의 향토색’이라 비판하고 박계리는 오지호의 맥이 닿는 색채사용을 강조한 부분과 심영섭, 김용준의 자연주의적 화풍을 통한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농촌모습을 담아내는 그림이 선전의 심사기준이라고 보았다. 본 논문에서는 오지호가 일본 유학 당시 일본 아카데미즘의 주류였던 외광파를 비롯해 스승 후지시마 다케지(藤島武二, 1867.10.15.∼1943.3.19.)에게서 받은 영향에 주목하였다. 특히 1926년부터 1928년까지 오지호의 초기 작품들에서는 아카데믹한 경향의 화풍이었으나, 동경미술학교 3학년 이후 본격적으로 후지시마 다케지에게서 유화 수업을 받기 시작하면서 화풍이 변화하는 과정을 분석한다. 이 시기에 오지호는 일본의 자연환경이 자신의 작업에 투영된 것을 인식하고, 이후 다양한 색조실험을 시작한다. 그 결과물로 오지호의 <시골소녀>(1929)는 후지시마와 다른 화풍의 변화를 보였다. 오지호는 1931년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에 돌아온 이후 스승의 화풍을 벗어나 조선의 향토색을 찾으려고 본격적으로 노력한다.(Ⅱ장) 한국 화단에서 오지호의 위치를 살펴보려면 1930년대 조선 화단의 전반적인 경향을 알아야 한다. 이 당시 선전의 심사 기준에 부합하려고 아카데믹한 화풍, 민속적 소재, 이국적 취향을 구사하는 화가들과 이에 대한 반발로 선전의 참여를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향토색 개념을 추구하는 화가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전자로는 동양화 작품 이영일의 <시골소녀>(1928)와 서양화 작품 이인성<가을 어느 날> (1934)을 분석한다. 두 화가는 1930년대 선전을 통하여 상을 받았으며, 선전의 심사기준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 일본 유학을 통해 일본식 외광파 영향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1930년대 조선화단은 선전과 일본 유학생들로부터 보급되었던 아카데미즘, 선전의 심사기준은 소재적 한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그 이상의 뛰어난 조형정신과 기법을 소화한 화가를 찾기 힘들게 하였다. 또한 조선 향토색의 정체성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과 우리의 감성에 맞는 형식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선전의 참여를 거부했던 이들은 <녹향회>창립회원으로 동양정신의 조선적 모더니즘을 주창했던 김용준과 아세아주의와 표현주의를 강조했던 심영섭 등이 있다. 이들은 조선 향토색에 대한 조형이념을 진행했다. 그 가운데 오지호는 친구인 김주경과 함께 조선의 자연을 소재로 일본과 차별화한 조선 향토색을 찾자는 이념을 피력하기 시작했다.『오지호·김주경 이인화집』(1938, 한성도서주식회사)출판은 이러한 노력의 초기 성과물이었다.『오지호·김주경 이인화집』출간 후 오지호의 향토색 개념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작품은 <남향집>(1939)이다.(Ⅲ장) 당시 선전 수상작들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경향과 비교해 본다. 오지호가 추구했던 표현 방식의 특징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남향집>은 선전의 심사기준을 배제하고 그렸다. 조선사회의 토속적 주택인 초가집 한 채를 크게 그려 구도를 달리하고, 고목나무와 그 나무 그림자로 자연을 부각시켰다. 민속적 소재 한복이 아닌 빨간 원피스를 입은 소녀로 묘사했다. 오지호의 작품 <남향집>은 1939년 5월「동아일보」에 실렸던 수필 오월송「五月頌」과 함께 이해했다. 오월송에 따르면 시대적 현실을 담아냈고 우리의 정서가 드러나 있다. 서양의 인상주의 기법과 이를 수용한 일본식 외광파의 양식을 수용하면서도 원색의 밝은 화풍으로 조선의 풍광을 재현한 것이다.(Ⅳ장) 오지호의 조형이론을 펼치도록 도와준 이는 김주경이다. 오지호와 김주경은 1923년 고려미술원에서 만나 녹향회 활동과 이인화집 출판 등으로 봤을 때 오지호와 회화관이 잘 맞았다. 선전에서 아카데믹한 화풍을 그려 다수 수상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오지호와 조형이념을 함께하고부터 색채면에서도 원색의 밝은 화풍과 인상주의 기법으로 조선의 향토색을 찾는다. 최열은 오지호와 김주경의 창작방법론과 창작까지 하나도 다른 게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Ⅴ장) 오지호와 동시대 활동했던 비평가 윤희순은『조선 미술사 연구』(초판 1946) 출판을 통해 조선의 향토색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론화하였다. 윤희순은 1930년대 조선의 향토색 개념에 대해 ‘시대와 사회와 계급의 저류를 흐르는 정조’야말로 ‘조선 정조’라고 지칭하며 민족사회가 추구하는 가치 표현에 주목하였다. 오지호는 1930년대 일제치하에서 <남향집>을 기점으로 자연과 삶의 가치를 조형적으로 표현한 화가라는 점에서 윤희순의 ‘조선 정조’ 개념을 가장 잘 구현한 화가이다.(Ⅵ장) 1930년대는 일본이 문화 정책 사업의 일환으로 일본식 ‘조선 향토색’을 강조하며 조선의 화단을 식민지화하려 했다. 이러한 일련의 시대적 흐름으로 조선 미술계의 향토색 개념과 정체성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조선을 대표한 오지호의 순수주의 조형이념은 민족의 현실과 가치를 담고, 밝고 명랑한 색채로 조선 향토색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한 것이다. 우리 민족 정서에 맞게 새 생명의 자연을 회화에 재현함으로써 한국적 인상주의가 오지호를 통해 토착화된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연구자들이 오지호의 회화 세계에 대해 다양하게 해석해 왔지만, 본 연구는 1930년대 우리화단의 향토색 개념과 문화적 정체성을 분석하여 오지호의 조형이념을 더 구체적으로 고찰한 점에서 연구 의의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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