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전반 한국의 은공예품은 그 시대가 요구하는 사회적・경제적・역사적 변화와 결과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과 같은 존재이다. 역사적으로 엄격한 국가적 통제를 받아왔던 은은 ... 20세기 전반 한국의 은공예품은 그 시대가 요구하는 사회적・경제적・역사적 변화와 결과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과 같은 존재이다. 역사적으로 엄격한 국가적 통제를 받아왔던 은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은광산의 채굴이 민간에게 개방되고, 대규모 제련소 설립으로 대량생산, 식민지의 값싼 노동력을 활용한 생산성 제고, 구매력을 갖춘 소비층의 등장으로 은공예품의 사용이 일반에게까지 확대되는 과정을 거쳐 생겨난 역사적 소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전반의 은공예품에 대한 연구는 연구자와 실물자료의 부족으로 미술품제작소(美術品製作所) 연구와 결부되어 제한적으로 언급되어 왔다. 또한 ‘왕실상징문장인 이화문(李花紋)을 가진 공예품=이왕직미술품제작소 제작품’이라는 예정된 결과를 가진 시각으로 20세기 은공예품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필자는 약 80여 점의 실물자료를 기반으로 각인, 문양, 제작기법을 분석함으로써 20세기 전반 은공예품의 실체를 파악하고, 당시 문헌자료와 신문기사 등을 참고하면서 제작소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논의를 진행하여 20세기 전반 은공예품 연구에 보탬이 되고자 하였다. 본 논문은 20세기 전반 한국 은공예품 및 제작소에 대한 통합적인 접근으로 그동안 미술품제작소에 대한 근대적 담론에 치중되어 왔던 연구의 외연을 확장하여 미술품제작소뿐만 아니라 신행상회(信行商會), 창신상회(昌信商會)를 위시한 세공상회를 새로운 연구대상으로 삼고, 검증을 거친 국공립박물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약 80점의 실물자료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여 20세기 전반 은공예품이 가지는 역사적인 지형의 진정성을 찾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20세기 전반에 왜 은공예품이 사회적으로 각광을 받았는지에 대한 시대적 배경과 영향관계, 이에 따른 은공예품의 사회적 인식과 기능에 주목하였다. 이를 위해 미술품제작소에 대한 연구는 선행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순종실록 부록과 황성신문, 매일신보, 대한매일신보 등 근대 신문기사, 근대 지도를 참고하여 미술품제작소의 위치와 건축규모를 규명하였고, 한성미술품제작소-이왕직미술품제작소-조선미술품제작소 3단계로 변천하는 단계별 설립과 해체과정 및 원인에 대한 근거를 마련하고 단계별 존립기간을 수정하였으며, 일제강점기라는 타율적인 시대적 배경과 함께 이봉래(李鳳來)와 도미타 기사쿠(冨田儀作) 등 관련 인물에 대한 검토를 진행하여 설립과 해체과정 이면에 숨은 의도를 밝히고, 그들의 행적이 미술품제작소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에 대해 논의하였다. 세공상회에 대해서는 신문기사와 광고, 경성상공안내(京城商工案內), 경성편람(京城便覽) 등의 상공업 관련 자료 등을 활용하여 종로에 밀집되어 있던 20여 개소의 세공상회를 확인하고, 신행상회, 화신상회, 창신상회, 윤광상회, 유창상회, 조선금은미술관 등 주요 세공상회의 위치를 지도로 작성하였다. 은공예품은 20세기 전반에 경성의 대표적인 특산물로 일컬어졌고, 종로의 세공상회는 미술품제작소에 버금가는 호황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학술적 접근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세공상회의 면모를 살피고자 했다. 실물자료는 연구자료의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 국공립박물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고찰하고, 일부 사립박물관이나 개인 소장품을 소개하였으며, 조선 왕실과 관련이 깊은 고바야시토케이텐(小林時計店), 핫토리토케이텐(服部時計店), 텐쇼도(天賞堂) 등 일본 세공상회의 제작품을 포함하였다. 특히 이화문이나 운현궁문이 있어 미술품제작소 제작품으로 잘못 분류되던 일본 고바야시토케이텐의 제작품의 원제작소를 밝혔다. 또한 미술품제작소와 세공상회 제작품을 종합하여 20세기 전반기 은공예품으로서 가지는 특징에 대해 논의하고, 유형 분류를 시도하였다. 이와 같은 학술적 접근을 통해 20세기 전반 은공예품이 부국강병과 식산흥업을 통해 근대화 및 산업화를 도모하기 위한 시대적 실천과제의 수단으로 미술공예 즉 산업미술품으로서 인식되고, 박람회를 통해 문명화의 척도로 언급되면서 당대를 풍미한 문화적 욕망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국가의 철저한 통제 아래에 있었던 은광의 채굴이 민간에게 이전되고 채굴된 은광석의 제련을 위한 대규모 제련소의 건립, 생산성 제고를 위한 왕실상징문장 이화문의 상품화 정책, 식민지의 값싼 노동력의 제공, 기계를 활용한 제작방법의 변화와 대량생산체제, 철도의 발달 및 관광업의 발달로 인한 기념품의 수요 증가, 일본 황실에서 사용되던 증답품인 봉보니에르의 대중화 등 여러 요인들에 의해 20세기 전반 한국의 은공예품 제작은 절정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20세기 전반 한국 은공예품은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 속에서 미술품제작소와 조선금은미술관과 같은 세공상회의 설립목적과 같이 쇠퇴해가는 전통미술을 계승하고, 심미성과 실용성을 겸비한 공예품의 확산과 대중적 인기라는 순기능을 가지면서도 일본에 의한 타율성과 통제권 아래서 대량생산과 기계생산방식, 규격화된 도안의 도입으로 인해 진정한 창작의 기회를 잃어버린 생산물이었다는 역기능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전반 한국 은공예품은 당대를 대표하는 미술공예품으로서 근대화와 산업화의 중심에 있었다는 점, 식민지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변화를 겪는 역사적 소산물이라는 점, 미술품제작소 출신 장인들을 통해 전통공예기술이 현대로의 계승된 점, 조선시대 은공예품을 취급하던 시전인 백목전으로부터 일제강점기 주요 세공상회를 거쳐 현재 종로의 금은보석전문상가로 이어져 은공예품의 생산과 소비가 현재도 진행형인 역사적 층위를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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