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대략 17~18세기에 간행되거나 필사된 조선의 병서 가운데 언해가 포함된 것을 다루었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 무예류(武藝類) : 3종 3본
○ 『무예제보(武藝諸譜)』(1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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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대략 17~18세기에 간행되거나 필사된 조선의 병서 가운데 언해가 포함된 것을 다루었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 무예류(武藝類) : 3종 3본
○ 『무예제보(武藝諸譜)』(1598)
○ 『무예제보번역속집(武藝諸譜飜譯續集)』(1610)
○ 『무예도보통지언해(武藝圖譜通志諺解)』(1790)
□ 연병류(練兵類) : 3종 18본
○ 『연병지남(練兵指南)』(1612)
○ 『병학지남(兵學指南)』(1649?/17C중/1688?/18C초/1708/1711?/1737/1739
/1740?/1746?/1760/1769/1787/1797/1798/1813)
○ 『진법언해(陣法諺解)』(1693)
□ 무경류(武經類) : 1종 3본
○ 『신간삼략언해(新刊三略諺解)』(1711)
○ 『신간증보삼략직해(新刊增補三略直解)』(1805)
○ 『신간증보삼략(新刊增補三略)』(1813)
□ 화기류(火器類) : 5종 9본
○ 『신기비결(神器秘訣)』(1603)
○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1635/1685/18C초?)
○ 『신전자취염소방언해(新傳煮取焰焇方諺解)』(1635/1685)
○ 『매화법(埋火法)』(18C중?)
○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1709?/1796)
사실상 조선 시대에 간행된 병서의 언해는 이들이 거의 전부이다. 따라서 병서 언해는 대체로 17~18세기 국어의 특징을 보여주는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병서는 의학 문헌, 음식 문헌, 농사 문헌 등과 더불어 기술서 부류에 속한다. 이 기술서 부류에는 문학, 종교, 윤리 등을 주제로 한 문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옛말의 모습이 잘 간직되어 있다. 병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병서 언해의 표기 체계, 음운, 문법 형태 등은 한국어의 역사적 변화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며, 그 어휘 목록은 17~18세기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지금까지 병서 언해에 관한 연구 업적이 적지 않게 쌓여 있지만, 병학(兵學)의 역사적 전개에 대한 거시적 관점을 가지고 종합적으로 고찰된 것은 찾기 어렵다. 이 연구는 병서 언해 문헌 전체에 대한 종합적 고찰의 필요성에서 출발하였다.
이 연구의 목적은 병서 언해 문헌과 관련된 다음의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마련하는 것이다.
1. 옛말에 대한 직관을 대신할 말뭉치는 어떻게 구축할 수 있으며, 병서 언해 말뭉치 구축 결과는 어떠한가?
2. 병서 언해 문헌 각각의 서지적 특징은 무엇이며, 그 전체적인 계통은 어떻게 수립할 수 있는가?
3. 병서 언해 문헌의 표기에 투영된 17~18세기 한국어의 특징은 무엇이며, 그 어휘 목록 가운데 특징적인 것은 무엇인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제1장에서 제시하였으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어떤 언어 단위의 음성적 형식과 그 의미 내용은 잦은 사용을 통해서 그 상관성이 공고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자주 사용되어야 그 상관성이 확립의 단계에 들어서는가 하는 점은 단정하기 어렵다. 더구나 지금 우리가 사용하지 않는 옛말이라면 그 음성 형식과 의미 내용 사이의 상관성은 더욱 판단하기 어렵다. 이 경우 판단의 근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각 언어 단위의 사용 빈도이다. 어떤 언어 단위의 사용 빈도를 파악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말뭉치 언어학의 방법론에 따라서 전자적인 말뭉치를 구축하고 그것을 분석 프로그램으로 처리하는 것이다. 전자 말뭉치를 구축할 경우의 이점은 단지 사용 빈도의 확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자 말뭉치를 통해 각 언어 단위 자체의 출처를 빠르게 검색할 수도 있고, 그 언어 단위의 음운론적․형태론적 사용 환경을 정확하게 가려낼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언어적 직관을 대신하여 옛말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이해를 원활히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연구에서는 문헌 실물 및 디지털 이미지에 대한 조사를 통하여 병서의 원문과 언해문을 모두 워드프로세서로 입력하여 전자 텍스트화하였다. 단, 『병학지남』의 경우 이본(異本)이 너무 많으므로 언어적 차이가 큰 여덟 가지 판본만을 전자텍스트화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 결과로 구축된 전자 말뭉치의 전체 규모는 약 8만 9천 어절에 약 29만 자이다. 이 가운데 한문 원문을 제외한 언해문의 규모는 약 7만 2천 어절에 약 19만 8천 자로서, 이 연구에서 본격적인 국어학적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전자텍스트의 전문(全文)은 부록1로, 그 어절 색인은 부록2로 각각 덧붙였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제2장에서 제시하였으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 간행된 병서는 중국 명나라 초기의 장수 척계광이 쓴 『기효신서』와 『연병실기』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특히 본 연구에서 다룬 병서들은 무경류를 제외하면 모두 『기효신서』 및 『연병실기』와 직간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 따라서 병서 언해 문헌에서 난해한 부분을 만나게 된다면, 그 해석 과정에서 『기효신서』 및 『연병실기』의 해당 부분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에 간행된 병서는 200여 종에 이르지만, 그 가운데 언해가 이루어진 것은 앞서 제시한 목록이 거의 전부이다. 조선시대에 문자 생활의 표준은 한문이었고 한글은 예외적인 표기 방식이었다. 그 많은 병서 중에서 일부만이 언해 대상으로 선택된 것은 그 언해 병서들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봉본 『병학지남』의 발문과 『신간삼략언해』의 서문에 나타난 글쓴이의 저작 동기에 따르면, 그 특별한 의미는 실제적인 군사 훈련을 정예화하거나 과거시험의 준비에 도움을 주려는 데 있었다. 따라서 병서 언해 문헌에 나타난 17~18세기의 한국어는 당시의 장교, 사병, 무과 응시자들이 일상적으로 듣거나 말하였을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 어휘나 표현이 이 문헌에 등장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다른 계층과 구별되게 지니고 있었던 그들 언어의 특징적인 면일 것이다.
무예류 병서에는 궁술을 제외한 각종 근거리 무기의 사용법과 권법이 서술되어 있다. 그 서술의 목표는 개별 군사의 휴대 무기 사용 능력 향상에 있었다. 여섯 가지 기예(技藝)가 수록된 『무예제보』(1598)는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무예제보에 누락되었던 네 가지 기예를 추가한 『무예제보번역속집』(1610)은 무예제보와 마찬가지로 한교(韓嶠 1556-1627)에 의해 언해된 것이다. 이들을 개정 증보한 『무기신식』(1759)이 간행된 바 있다고는 하지만 현재 전하지 않는다. 『무예도보통지언해』(1790)는 『무기신식』을 계승 발전시키라는 왕명에 따라 간행되었다. 이것은 방대한 문헌 고증과 아름다운 판화가 돋보이는 무예류 병서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모두 24가지의 기예를 수록하였으며, 그 기예의 실제적인 수련법 부분에 한하여 언해가 이루어졌다. 무예류 병서에는 여러 가지 몸동작을 나타내는 어휘가 다채롭게 구사되어 있다.
연병류 병서는 전투 상황별 교전 수칙, 전투 대형, 주야간 신호 방법 등에 관한 훈련 교본 또는 야전 교범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무예류 병서가 개인 단위의 전투 능력 향상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연병류 병서는 부대 단위의 전투 능력 향상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연병지남』(1612)은 특히 북방의 방어를 위해 마련한 전차, 기병, 보병의 통합 전법을 기술하였다. 『병학지남』(17C초~1813)은 4권 또는 5권으로 구성된 것이지만 권1과 권2에 대해서만 언해가 이루어졌다. 이 문헌은 조선시대 군대 조련의 기본서였기 때문에 전국의 주요 관아에서는 자기 병영의 특성에 맞게 이를 수정하여 간행하였다. 그런 까닭에 현재 대략 스무 가지 안팎의 다양한 이본이 남아 있다. 이들은 저마다 언해 내용이나 표기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약 2세기에 걸치는 한국어의 변화를 잘 나타내 준다.
『병학지남』의 권1과 권2는 시기를 달리하여 각각 언해되었다. 권1의 첫 언해는 한교에 의해 17세기 초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이것을 1684년에 최숙(崔橚 1646-1708)이, 1787년에는 이유경(李儒敬 1747-?)이 각각 개정하였다. 1708년에 간행된 별후영본의 언해는 다른 이본과의 차이가 크므로 독자적인 계통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권2는 1684년에 최숙이 처음 언해하였는데 한자 표기와 한글 표기가 섞여 있었다. 이것을 1787년에 이유경이 대대적으로 개정하면서 한글 전용 표기로 바꾸었다. 권3의 말미에 첨부된 비고(備考)의 내용을 기초로 하여 범례와 발문의 서지적 정보를 종합하면 병학지남의 이본 계통은 크게 여섯 가지로 나누어진다. 이러한 분화가 갖는 국어사적 의의를 찾는다면, 약 2세기에 걸친 『병학지남』의 수정이 결과적으로 17~18세기 한국어의 역사적 연구에 여섯 가지 유형의 어형 변화표를 제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진법언해』(1693)에는 한문 원문이 없기 때문에 형식상으로는 언해가 아니다. 그러나 언해 내용의 대부분이 『병학지남』의 한문 원문에 대응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언해 문헌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문헌이 특히 연구자의 눈길을 끄는 점은, 그때까지 간행된 병학지남의 어떤 이본에도 수록된 바가 없던 권5의 언해가 7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숙이 『병학지남』 운봉영본의 원고를 완성한 지 9년 만에 『병학지남』과 동일한 편찬 의도를 가지고 펴낸 것이 바로 『진법언해』이다. 따라서 이것은 사실상 『병학지남』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각종 진형도(陣形圖)만 수록된 권3과 권4를 제외하면 『병학지남』의 거의 전부가 언해된 셈이다.
무경류 병서의 세 문헌은 모두 저자 미상의 중국 고대 병서 『삼략』을 언해한 것이다. 병서 언해 문헌 가운데서 『기효신서』와 무관한 것은 이들뿐이다. 『삼략』의 내용은 개인 단위이건 부대 단위이건 실제적인 전투 능력 향상과는 거리가 멀다. 이것은 주로 제왕과 사대부가 군사 문제를 다룸에 있어 유념해야 할 정치적 입장과 윤리적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 『삼략』은 전술(tactics)보다 전략(stratagem)의 중요성을 강조한 병서이다. 17세기에도 『삼략』의 언해는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전하는 것으로는 『신간삼략언해』(1711)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문헌에는 한자 어휘를 고유어로 번역하지 않은 채 표기만 한글로 바꾼 것이 많다. 『신간증보삼략직해』(1805)와 『신간증보삼략』(1813)은 한문 원문에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언해문은 큰 차이가 없다. 두 문헌의 표기 양상으로 미루어 볼 때, 18세기 말 ~ 19세기 초 한국어의 모습을 사실에 더 가깝게 반영하는 것은 『신간증보삼략직해』이다.
화기류 병서에는 원거리 무기인 각종 총통의 운용법, 화약의 배합법, 화약의 주성분인 염초(焰硝)의 제조법 등에 관한 사항이 다루어져 있다. 『신기비결』(1603)에는 극히 일부의 구절에 대해서만 언해가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 문헌에는 <ㆁ>(옛이응)이 사용된 ‘쇠이’ 등 주목할 만한 몇몇 어휘가 들어 있다. 『화포식언해』(1635/1685/17세기 말)는 이 부류 문헌의 기본서로서 화기(火器)에 관한 전반적인 사항이 언해되어 있다. 『화포식언해』는 세 가지 이본이 존재하는데, 언해 내용 면이나 표기법 면에서 뚜렷한 차이가 나타나지는 않는다. 『신전자취염소방언해』(1635/1685)와 『매화법』(18C중?)은 『화포식언해』에 합철된 형태로만 존재하므로 엄밀한 의미에서는 독립된 문헌이라고 할 수 없다. 『매화법』은 일종의 지뢰 매설법을 간략히 필사해 놓은 문헌이다. 『화포식언해』와 『신전자취염소방언해』에는 다양한 형태의 합용병서(合用竝書)가 사용되었으며, ‘수량사+단위명사’의 짜임을 가진 구가 많이 등장한다. 『신전자초방』(1709?/1796)은 『신전자취염소방언해』의 개정판에 해당하는 문헌으로서 염초 제조 공정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첫 언해는 1698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나 현전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다양한 각자병서(各字竝書)가 사용되었고, 다른 문헌에서 볼 수 없는 희귀한 어휘가 여럿 보인다.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제3장과 제4장에서 제시하였으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병서 언해 문헌에 담긴 17~18세기 한국어의 특징을 파악하기 위한 첫걸음은 그 표기 양상을 분석하는 것이다. 표기 양상의 분석은 그 문헌에 어떤 글자들이 사용되었는가를 파악하는 데서 출발한다. 병서 말뭉치에서 한문 원문은 물론이고 언해문에 포함된 한자까지 모두 제거하고 남은 한글 음절자의 수효는 183,511자이다. 이를 다시 초성자, 중성자, 종성자로 분리하되 오각으로 인한 기형적인 문자는 제외하였다. 그 결과로 확인된 문자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사용빈도순 나열)
○ 초성자 :ㅇ ㄹ ㄱ ㅎ ㄷ ㄴ ㅁ ㅅ ㅂ ㅈ ㅊ ㅌ ㅍ ㅄ ㅋ ㅼ ㅺ ㅆ ㅽ
ㅳ ㄸ ㅶ ᄣ ㄲ ᄥ ㅃ ᄢ ㅲ ᄦ ᄩ ㅄㅌ ᄴ ᄸ ᄻ
○ 중성자 :ㅏ ㅣ ㅗ ㆍ ㅡ ㅕ ㅓ ㅜ ㅢ ㅑ ㆎ ㅘ ㅔ ㅐ ㅚ ㅖ
ㅠ ㅛ ㅟ ㆌ ㅝ ㅒ ㆉ ㅞ ㅙ ᅿ
○ 종성자 : ㄴ ㄹ ㅇ ㅁ ㄱ ㅅ ㅂ ㄷ ㄼ ㄺ ㄻ ㆁ ㄱㄹ ㅂㄹ ㅈ
중성자의 사용 환경을 어두인 경우, 어중인 경우, 어말인 경우로 분리하여 각각 그 용례들과 비교함으로써, 모음에 관련된 몇 가지의 음운론적 특징을 찾을 수 있었다. 17~18세기의 병서 언해 문헌에는 <아>로 시작하는 어절이 <>로도 나타나는 예가 전혀 없는데, 이는 적어도 어두 위치에서 /ㆍ/의 비음운화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음운론적, 형태론적 환경이 동일한 단어를 표기할 때 <에>와 <예>, <애>와 <얘>의 혼용이 거의 없는 점으로 보아 /ㅔ/와 /ㅐ/는 아직 단모음으로 확립되지 않았다. 동일한 어간 뒤에 결합되는 접사 또는 어미의 표기에 <오>와 <우>, <야>와 <여>가 혼용된 것은 모음조화 표기 의식의 약화를 보여 준다. 같은 어휘의 표기에 반모음 /j/가 포함된 것과 포함되지 않은 것이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으므로 전설모음화가 광범위하게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초성자의 사용 환경을 어두인 경우와 어중인 경우로 분리하여 각각 그 용례들을 비교함으로써, 자음과 관련된 몇 가지의 음운론적 특징을 찾을 수 있었다. 합용병서는 ㅂ 계열, ㅅ 계열, ㅄ 계열의 세 가지가 사용되었는데, 어두 환경과 어중 환경에서의 표기 양상으로 보아 이들 가운데 어두 자음군을 나타낸 것은 없다. 이들은 대부분 경음 기호 구실을 한 것이다. 그런데 ㅂ 계열의 ‘ㅷ’, ㅅ 계열의 ‘ᄸ, ᄻ’, ㅄ 계열의 ‘ㅄㅌ’이 유기음을 나타낸 것과, 경음을 나타내는 각자병서가 증가되는 경향을 보인 것은 경음 기호로서의 ㅂ, ㅅ, ㅄ의 기능 인식에 다소의 혼란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경음을 나타내는 각자병서로 ‘ㅆ’의 빈도가 가장 높지만 ‘ㄸ, ㄲ, ㅃ, ᄴ’도 사용되었다. ‘ㅉ’이 보이지 않는 것은 ‘ㅶ, ㅾ, ᄦ’이 아직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성자의 사용 환경을 어중인 경우와 어말인 경우로 분리하여 각각 그 용례들을 비교함으로써, 자음과 관련된 몇 가지의 음운론적 특징을 찾을 수 있었다. 사용 빈도가 높은 음절말 자음은 공명음 /ㄴ/, /ㄹ/, /ㅇ/, /ㅁ/이며, 장애음 /ㄱ/, /ㄷ/, /ㅂ/은 상대적으로 빈도가 낮은 음절말 자음이다. 표기상으로는 <ㅅ>이 지배적이지만 발음상으로는 /ㅅ/이 빠진 7종성 체계인 것이다. 어말 환경으로 한정할 겨우 /ㅇ/, /ㅁ/보다 /ㄱ/, /ㄷ/의 기능 부담량이 훨씬 더 크다. /ㅇ/, /ㅁ/, /ㅂ/은 주로 어중의 음절말 자음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연구개 비음으로서 /ㅇ/과 경쟁하던 /ㆁ/은 『무예제보』와 『신기비결』에만 약간의 흔적이 보인다. 음절말 자음군으로는 //, //이 있으며 //은 매우 드물다.
전통 한자음이 표기된 문헌은 무예류 전부, 『신전자초방』을 제외한 화기류 전부, 무경류의 『신간삼략언해』이다. 다른 문헌들도 언해문 속의 한글로 표기된 한자어를 통해 간접적으로 한자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들을 대상으로 중세국어의 한자음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 한자음이 변화된 경우, 과도 교정이 나타난 경우를 분리하여 각각 그 용례들을 비교함으로써 17~18세기에 완성되었거나 19세기 이후 전개될 음운 현상을 찾을 수 있었다. 중세국어 시기에 <츙, 진, 츌>로 적혔던 ‘銃, 進, 出’이 착오에 의해 <튱, 딘, 튤>로 역표기된 것이라든가 ‘戰, 鐵, 持’이 <뎐, 텰, 디>로도 표기되고 <젼, 쳘, 지>로도 표기된 것은 ㄷ 구개음화의 완성을 증명해 준다. 중세국어 시기에 <불>로 적혔던 ‘佛, 不’이 <블>로 역표기된 것은 원순모음화의 완성을 반증해 준다. ‘兩냥, 靈녕’은 ㄴ 두음법칙이 일어나기 전의 표기를 보여주고 ‘書셔, 手슈’는 마찰음 아래의 단모음화가 일어나기 전의 표기를 보여준다.
문법 형태와 관련된 몇 가지 특징을 들면 다음과 같다.
주격 조사로는 {-이}가 지배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새로운 주격 조사인 {-가}는 『신전자초방』에만 등장한다. 더욱이 그 음운론적 환경이 /ㅣ/계 모음 아래로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18세기 초까지는 주격 조사 {-가}가 {-이}의 이형태로 확립되지 않은 듯하다. 목적격 조사는 현대국어와 마찬가지로 모음 아래에는 {-를}, 자음 아래에는 {-을}이 쓰였다. 예외적으로 어간 말음이 [ㄹ]일 때 {-를}이 쓰이고 어간 말음이 [ㅣ], [ㆍ]일 때 {-을}이 쓰이기도 했다. 특이하게도 『신간증보삼략』에서는 음운론적 환경과 상관 없이 일률적으로 {-를}을 사용했다. 속격 조사는 {-의}가 지배적으로 사용되었다. 현대국어에서는 복합어 표지로만 남아 있는 {-ㅅ}도 속격 조사로 활발히 쓰였으나 속격 조사라기보다는 복합어 표지라고 해야 할 경우가 적지 않다. 중세국어 시기에 {-의}의 모음조화 교체형으로 널리 쓰였던 {-}는 ‘나라[國]’, ‘올[鴨]’를 제외하고는 용례가 보이지 않는다. 처격 조사로는 {-에}, {-애}, {-}, {-의}가 형태론적 환경에 따라 달리 사용되었다. 어간 말음이 [ㅁ]인 경우로 제한하면 {-에}, {-의}는 체언에만 결합되고 용언의 명사형에는 결합되지 않는다. {-}, {-애}는 용언의 명사형과 체언에 두루 사용되었으나 {-}의 사용 빈도는 높지 않다. 처격 조사를 선택함에 있어서 모음조화를 고려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호격 조사로는 『연병지남』에 {-하}, {-아}가 사용되었다. 중세국어의 {-하}는 존칭 체언 뒤에 결합하여 높임법 선어말어미 {-시-}, {--}와 호응하였으나 여기서는 {-아}와 다른 점이 없다.
높임법 선어말어미는 명령문 일색인 병서의 특성상 주체높임 몇 예를 제외하고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시상 선어말어미는 {-앗-}, {-리-}, {-더-}, {--} 등이 시제의 성격을 분명히 하면서 활발히 사용되었다. {-겟-}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서법 선어말어미는 대체로 단순화하였는데 훈시적 성격을 지닌 병서의 특성상 원칙법의 {-니-}가 많이 쓰였다. 감동법의 {-도-}, {-로-}는 『신전자초방』에만 드물게 보인다. 동명사 구성, 화자 표지 등의 선어말어미 {-오-}는 그것을 탈락시킨 형태가 높은 빈도로 나타나므로 그 문법 기능이 불분명해졌다고 볼 수 있다. 종결어미로는 명령형 {-라}와 설명형 {-니라}, {-이라}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드물게 의문형 {-냐}, {-가}, {-고}가 보인다. 연결어미의 {-도록}은 현대국어의 {-ㄹ수록}에 해당하는 의미 기능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병서 언해 문헌에는 현대의 군대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군사 관련 어휘가 풍부하게 나타난다. 그것들은 대부분 한자어이지만 고유어도 적지 않다. 그 가운데 인상적인 몇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수군[車兵], [馬兵], 도리채[鞭棍], 말암쇠[蒺藜], 창 밀[槍尾], 밋뒤다히[根後], 밋몸[根粗], [車輪], 구레[轡], 퉁가마[銅鍋], 딜두모[陶盆], 근쇠[淸鐵], 방하쇠, 두에쇠, 블호령, 곱뎡삽[曲鍤], 서래[三夫版鍤], 즹[金], 불묵금[縛火], 마양이 가지[鞍橋], 손구, 구, 궁동이, 샃, 주머귀, 목쥴되
여기에는 다른 문헌에서 자주 볼 수 없는 희귀어나, 형태소 분석이 곤란한 난해어도 여럿 등장한다. 그 가운데 인상적인 몇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앗라[進], 전즐워[通], 셔게[起脊], 골지게[有血漕], 지조로디[壓], 겨[卽時], 그어[抽], 돏[定], [零], 도모돈[摠], 근쇠[淸鐵], 믈겨, 뒤볼 굿[厠坑], 어긔롭거나[違], 드이[聽], 니이[連], 조안좀[小頓坐], 어둑[動], 붓내[揚], 져[制], 래[迲], 즈나[備], 슈굴너[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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