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州 李敏求의 詩文學 硏究 (2)[韩语论文]

资料分类免费韩语论文 责任编辑:金一助教更新时间:2017-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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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7세기 文人인 東州 李敏求(1589∼1670)를 대상으로 그의 시문 창작 방법과 지향점을 살피고, 이민구의 시문학관 형성 배경과 시문학관의 실체, 그리고 시문학관과 한시 작품 간의 연...

본 논문은 17세기 文人인 東州 李敏求(1589∼1670)를 대상으로 그의 시문 창작 방법과 지향점을 살피고, 이민구의 시문학관 형성 배경과 시문학관의 실체, 그리고 시문학관과 한시 작품 간의 연관성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글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민구의 시문학이 갖는 문학사적 의의를 밝히는 것이 본고의 최종적인 목적이다. 조선을 세운 왕족의 후손이었으며, 실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芝峯 李睟光의 아들로 태어난 이민구는 타고난 총명함과 文才를 바탕으로 1612년 문과에 급제한 뒤 인조대에 이르러 활발한 관직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 수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죄로 유배된 이후 다시 정계에 발을 들이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문학적 능력은 여러 문인들에게 인정을 받았고, 특히 18세기 후반 남인의 정치적 지도자였던 樊巖 蔡濟恭에 의해 남인 시맥의 가장 첫 번째 자리에 이름을 올렸다. 茶山 丁若鏞도 「古詩二十四首」에서 東州의 불우했던 일생을 요약하여 그를 ‘詩雄’이라고 하였다. 채제공과 정약용의 이러한 평은 남인들 사이에서 이민구의 시문학이 갖는 위상을 잘 보여준다. 이밖에 많은 詩話 속에 등장하는 이민구와 관련된 일화들을 통해 그의 문학적 재능을 유추할 수 있다. 이민구라는 인물이 지닌 문학적 재능과 남인 시맥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볼 때 그는 충분히 연구의 대상으로 다루어 볼 만하다. 하지만 이민구는 남인 시맥의 가장 처음에 자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문학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가 부족한 편이다. 어쩌면 그의 문집에 수록된 적지 않은 양의 詩와 文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민구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그의 문학적 측면보다 문학사적 측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민구의 명성은 그의 문학적인 능력이 있었기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문학적 연구는 미진한 측면이 있었다. 이에 본고 ‘동주 이민구의 시문학 연구’에서는 기본적으로 이민구의 문학관과 그의 시문학이 갖는 역량과 문학적 가치를 확장하고 확인하는 연구를 수행하고자 한다. 또 이를 통해 이민구가 남인 시맥의 종장으로 일컬어질 수 있었던 원인을 규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수광에서 이민구로 이어지는 가학의 시맥뿐만 아니라 17세기 전반 문단의 특징과 초기 남인 시맥의 시문학적 특징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고에서 검토대상으로 삼은 판본은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영인한 ��東州集��이다. ��동주집��의 정확한 간행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현재 남은 판본은 규장각․국립중앙도서관․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 가운데 초간본은 규장각본과 연세대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민족문화추진회의 ��동주집��은 숙종 연간에 간행한 규장각본을 영인한 것이다. 따라서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영인한 ��東州集��을 기본 텍스트로 삼아 연구를 진행 하였다. ��東州集��에는 구성에 있어 두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첫 번째는 詩集이 文集에 비해 현저히 많다는 것이다. 권별로 따졌을 경우 시집은 33권, 문집은 10권으로 시집이 문집의 3배가 넘는 분량이다. 문집의 산정은 이민구 본인이 했는데 이처럼 문에 비해 시의 양이 훨씬 많다는 점은 스스로 시에 특장이 있다고 여겼고 또 스스로를 시인으로 자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묘유록」을 제외한 나머지 시집은 전부 이민구가 외지에 나가 있을 때 지은 시를 모았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순탄치 않았던 이민구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이렇듯 ��동주집��은 구성만으로도 이민구의 굴곡진 삶과 애호를 자연스럽게 살필 수 있다. 이민구의 문학관을 파악하기 위하여 먼저 인물의 현실 인식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민구가 정계참여에 강한 욕구를 지녔다는 점을 통해 현실참여적인 인물임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는 이민구가 효용적이고 사실적인 문학관을 갖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또한 이민구는 아버지 이수광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첫 번째는 家學이고 두 번째는 아버지에 의한 사숙․교유관계의 형성이다. 아버지 이수광은 實學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인물로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경험을 중시하며 문학 창작에 있어 진실을 중요시 여겼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성리학적 사상이 강화되는 사회적 풍토 속에서도 정통 주자학이 아닌 양명학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로 인해 이민구 역시 양명학 이외에 諸子들의 사상을 부정적인 견해 없이 접할 수 있었다. 성리학 이외에 다양한 설을 접할 수 있었던 이민구는 문학의 문예적 측면을 인정할 수 있었고, 그는 자신의 감정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매개체로서 문학을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민구의 인생에 있어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었던 유배를 통해 자신의 문학을 進一步 한 계기로 삼았다. 재도관을 바탕에 두었던 이민구는 문학의 효용성을 첫 번째 목표로 설정했다. 이민구에게 문학의 효용성은 개인의 수양이 아닌 사회적 효용을 의미하며 현실 사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글을 짓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민구는 현실 사회에 쓰이기 위해서 현학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글보다는 현실에 부합하는 글을 써야 한다고 여겼고, 그 도구로써 사실성의 중시를 내세웠다. 그러면서도 문학성을 인정하여 자득을 중시하였다. 자득을 통한 독창성을 추구했던 이민구는 자연스러운 성정의 표출을 중시하였고 자신의 생활 주변에서 보고 느낀 것을 제재로 삼아 시를 지었다. 또한 산수기행의 취미와도 맞물려 자신의 정감을 진실하게 표현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특히 정감의 진실한 표현은 이민구가 중시했던 독창성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그의 한시를 살피는 데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이민구의 시세계를 크게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인식과 獨白’, ‘생활 주변의 觀照’, ‘개성적 표현을 통한 참신성 추구’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인식과 獨白’은 ‘阨窮과 鬱憤의 토로’와 ‘현실에 대한 비판적 述懷’로 나누어 이민구가 현실에서 느낀 개인적․사회적 부조리를 읊은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생활 주변의 觀照’에서는 ‘한가로운 삶에서의 興趣’와 ‘생활 속 印象的 체험과 省察’로 살펴보았다. 이민구는 평범한 생활 주변에서 특별함을 발견해 시의 소재로 삼거나 일상에서 느끼는 한가로운 흥취와 여유로운 정서를 시에 담아냈다. ‘개성적 표현을 통한 독창성 추구’에서는 ‘山水自然 속 情感의 진실한 표현’과 ‘순간의 捕捉과 육언시에 드러난 詩才’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이민구의 山水愛好에 초점을 맞춰 산수자연에서 느낀 여러 가지 감정을 과장 없이 진실하게 표현된 산수시를 살펴보았다. 이어서 순간을 포착하고 기교 중심의 육언시를 창작하여 詩才를 드러낸 모습에서 이민구의 개성적인 측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17세기 조선은 국내외의 여러 사건들로 인해 사회적 혼란이 심했던 시기이다. 사회적 혼란은 곧 道의 쇠락으로 인식했던 당시의 문인들은 고문론을 통해 유가사상을 강화하려 했지만, 반대로 문학에 대한 독자적 가치를 인정한 문인들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민구는 재도관을 주장했지만 도학자보다 문인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는 생활 주변에 관심을 갖고서 문학 활동을 하였고, 산수유람에 대한 취미는 시를 짓는 강한 동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지어진 그의 시는 사실성과 감정의 진실한 표현을 중시하였는데, 이 점은 18세기에 대두되었던 시창작 경향과 맞닿는다는 점에서 이민구는 새로운 시를 적극적으로 탐색하고자 했던 문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민구의 문학적 성취는 가학으로 후손들에게 이어져 문한가의 전통을 이어갈 수 있게 하였다. 또한 그의 교유와 사승은 특정 당파에 국한되지는 않았으나 남인계 주요 인사들과의 교유 및 사승은 이민구가 후대에 근기 남인 문인들에게 회자될 수 있었던 계기이자 그의 문학적 영향력이 18세기 남인들에게 미치게 된 계기로 작용하였다. 그 결과 이민구는 채제공에 의해 근기 남인 시맥의 선두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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