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壁 崔述(1740~1816)은 淸代 乾隆ㆍ嘉慶 연간에 고증학을 심도 있게 연구하여 근대의 학자들에게 유가경전에 대한 새로운 안목과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게 해준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당... 東壁 崔述(1740~1816)은 淸代 乾隆ㆍ嘉慶 연간에 고증학을 심도 있게 연구하여 근대의 학자들에게 유가경전에 대한 새로운 안목과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게 해준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당시 乾嘉시기의 고증학자들은 文字나 音韻 및 訓詁 등의 수단으로 역사문헌의 眞僞 여부를 판별하여 역사학을 연구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최술 역시 역사문헌과 고대사를 고찰할 때 文字나 音韻 등에 대한 주변지식의 응용을 보조적인 방법으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문헌상의 갖가지 記述을 문자학 방면뿐만이 아니라 歷史的 文化的 관점에서 입체적이고 다원적으로 조명하고 해석하였다. 본고에서는 최술 고증학의 학문 방법을 네 가지로 분류해서 분석하였다. 첫째, ‘體例를 적용한 考證 措施’ 둘째, ‘以經爲主의 演繹 措施論’ 셋째, ‘文字와 音韻의 지식을 활용한 辨證’ 넷째, ‘考證과 評論의 혼용 措施’등으로 분류하였다. 최술의 고증학 방법론에서 다른 어느 고증학자와도 변별이 되는 점은, 그가 考信錄 전체에 자신의 고증학적 성과를 편집하고 자료를 배치하는 과정에서 독자적이고 과학적인 체례를 신뢰도에 따라 8개 부문으로 나누어 배치하였다는 점이다. 첫째, 考信錄에서 史料를 변증하는 과정에서 제일 먼저 해당 經文을 제시하고傳에 기록된 史料를 【降一字】와 【補】에 배치하고 있다. 이들은 가장 신뢰할만한 傳의 기록이며, 한 글자를 내려써서 經文과 구별하거나(【降一字】) 요점을 제시한 것은 ‘【補】’를 표시하여 經文과 구별하였다. 둘째, 傳의 기록 가운에 비록 ‘그가 신뢰하지 않는 典籍’에 실린 기사일지라도 ‘사실이 아님을 입증할만한 근거가 없는 史料’는 【備覽】에 배열함으로써 그 史料의 가치를 인정하였고, ‘그가 신뢰하는 典籍’에 실린 기사일지라도 그것이 ‘사실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史料’일 경우에는 【存疑】에 배치함으로써 판단을 보류하였다. 셋째, 그 傳의 기사가 발생한 時期를 정확하게 상고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누락해서는 안 되며 이치상 취할 만한 史料’가 있으면 ‘그 時期와 관련된 史料’를 【附錄】에 배치하여 당시에 일어난 일들을 유기적으로 구성하는데 활용하였다. 또한 【附論】을 두어서 ‘이미 확보한 자료’들에 필요한 부분을 덧붙여서 ‘논증을 보충하는 史料’로 활용하고 있었다. 넷째, 대체로 上古時代의 일은 三代의 일과 달리 보존 자료가 없기 때문에 당시의 기록이 아닌 ‘後代의 기록’일지라도 그 이전의 기사에 대해 증거로 삼을만한 자료라고 판단한 것을 【備考】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春秋시대에 해당하는 기사를 변증하는데, 비록 秦漢시대에 만든 史料라고 할지라도 【存參】에 배치하여 그것이 참고할만한 자료임을 밝혔다. 이들은 이전 시기의 역사에 대한 후대의 기록이기 때문에 ‘결점이 있을 수 있는 자료들이지만 그것을 보존하여 참고할만’하다고 판단한 자료들이다. 최술은 역사문헌과 역사사건의 진위를 가릴 때 우선 儒家 經傳을 참고하였고 그것과 함께 논리적으로 추론해나가는 방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였다. 그가 역사를 변증할 때의 확신에 찬 논조는 구체적인 史料들과 함께 『考信錄』의 도처에서 철저히 운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당시의 고증학이 기본적으로 정형화된 산문 문체와 논설체를 벗어나지 못한 것에 비해 실증적이고 풍자적인 예화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고증과 평론을 혼용하는 독창적인 방법론을 활용하였다. 그는 자신의 논증에 확신을 주는 방편으로 촌철살인의 비유를 들어 연역적 결론을 도출하는 수법을 구사하였고 각종 문학적인 수사기법을 사용하면서 논리적인 辨證과 함께 經世濟民을 추구하는 실학적인 時事 비평을 병행하였다. 최술은 이러한 고증학 방법론을 다양하게 활용함으로써 典籍들의 史料를 철저히 변증하였고 다양한 典籍에 대한 辨僞와 考證을 통해 『考信錄』에서 이루어낸 고증학적 성과를 매우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韩语论文,韩语毕业论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