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신라와 일본 간의 정치적 긴장이 표면화된 734년부터 양국 간의 공적 외교가 단절된 779년까지 신라가 대일외교에서 추구한 것을 추론함으로써 신라의 일본에 대한 인식을 고찰한 것... 이 글은 신라와 일본 간의 정치적 긴장이 표면화된 734년부터 양국 간의 공적 외교가 단절된 779년까지 신라가 대일외교에서 추구한 것을 추론함으로써 신라의 일본에 대한 인식을 고찰한 것이다. 논의는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진행했다. 먼저 734년에 신라와 일본 간의 외교 양상이 변화된 계기를 신라사에 입각하여 검토했다. 다음으로 주로 일본 측 사료에 대한 엄밀한 검토를 통해 734년 이후 신라의 대일외교의 추이와 성격을 고찰했다. 이러한 검토 결과를 바탕으로 8세기 중후반 신라의 일본 인식을 살펴보았다. 우선 734년에 신라가 일본에 파견한 사신이 자국을 ‘왕성국’이라 칭한 것이 문제시되어 본국으로 돌려보내진 사건에 주목했다. 이 사건 이후 일본에 파견된 신라 사신들이 기본적으로 입경하지 않은 채 大宰府에서 본국으로 돌려보내지는 한편, 신라 또한 일본 사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등 양국 사이에 정치적 긴장이 표면화되었다. 통일기 신라의 대일외교는 668년에 당과의 관계 악화를 배경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734년에 양국 사이에 정치적 긴장이 표면화된 것은 당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정세가 변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실제로 신라는 나당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뒤, 당 지향적 외교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이는 삼국 통일이라는 과업을 이룬 신라가 국가 발전을 위해 당의 제도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한 의도에 기인한 것이었다. 신라의 이러한 움직임은 8세기 중반에 당으로부터 받은 국가로서의 높은 평가로 이어졌다. 또한 720년대에 당과 발해의 관계가 악화된 것은 나당관계가 개선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신라의 대일외교 정책도 변화되기 시작했고, 이러한 시대적 상황이 일본 조정으로 하여금 신라의 ‘왕성국’ 표방을 문제시하게 했음을 밝혔다. 734년 사건 이후 양국 사이에 정치적 긴장이 표면화되었다. 752년에 일본에 파견된 신라 사신이 입경했으나, 이는 양국의 주체적인 의도가 작용한 결과 진행된 외교 교섭이었다. 특히 이때 신라 사신이 일본 조정으로부터 처음으로 외교 방식에 관한 요구 사항을 제시된 것은 동년 4월에 일본에서 거행된 국가적 불교 행사를 통해 일본 조정이 신라의 ‘왕성국’ 의식을 능가하는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다고 인식한 것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에 근거하여 753년에 신라에 일본 사신이 건너왔으나, 신라왕은 이를 오만무례하다는 이유로 배척했다. 이후 일본은 신라에 대해 능동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으나, 한편 신라는 760년 이후 대일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이는 안사의 난을 계기로 불안정해진 동아시아 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방책이고, 772년에 신라가 일본에 대해 대등한 국가임을 표방한 것 및 779년에 우호적인 태도로 대일외교를 진행한 것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신라가 752년에 처음으로 일본 조정으로부터 외교 방식에 관한 요구 사항을 제시된 배경에는 일본 조정이 신라의 ‘왕성국’ 의식을 불교적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 있었다. 그러나 요구 사항에는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 조정은 760년 이후 요구 사항을 변경하여 제시하게 되었다. 그런데 779년에 신라가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로 외교 교섭을 진행하려 했기 때문에 ‘표문 지참’이라는 752년 요구 사항과 동일한 요구 사항이 제시되었다. 표문은 상위에 올리는 문서 형식인데, 신라는 대일외교에서 문서 자체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는 천황이라는 호칭이 당 중심의 동아시아 세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신라의 ‘왕성국’은『삼국사기』에 보이는 ‘왕성’이라는 단어가 신라의 영역과 관련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듯이 8세기 중반에 당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실질적인 삼국통일 의식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요컨대 신라는 국가 발전 및 동아시아 정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현실적 필요에 따라 스스로 당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의 편입을 추구했으며, 그렇게 형성된 자국의 세계관을 대일외교에 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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