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전통과 근대가 충돌하던 조선 말에서 대한제국기까지 왕실 내부에서 나타난 도화서(圖畵署)의 폐지와 이관에 대해 고찰해보고, 화단으로 진출한 화사의 작품 제작과 민간 화단에 ...
본 논문은 전통과 근대가 충돌하던 조선 말에서 대한제국기까지 왕실 내부에서 나타난 도화서(圖畵署)의 폐지와 이관에 대해 고찰해보고, 화단으로 진출한 화사의 작품 제작과 민간 화단에 등장한 궁중화풍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본래 도화서는 조선 초부터 예조(禮曹)의 하위 아문으로 설치되어 왕실을 비롯한 사대부의 도화업무를 맡았다. 도화서는 왕실의 행사나 기념일을 기록하고 국정을 수행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관이었다. 그런데 화폐경제의 발달로 재정의 지출 규모가 급증하게 되어 재정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삼정(三政)의 문란과 더불어 정권을 잡은 세도가들이 매관매직과 부정부패로 19세기의 조선사회는 통치의 한계가 극점에 달하게 되었다. 게다가 세도가들의 착취와 공금횡령은 농민수탈로 이어져 농민항쟁과 신종교의 창도를 유발하였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조선사회를 바라보며, 개화파는 근대적 개혁을 모색하였고 1894년 서구지향 운동이었던 갑오개혁을 일으킨다. 개화파는 행정체계를 근대적 내각 체제로 변형시키고, 정부와 왕실의 분리를 시도하였다. 그리고 왕실의 업무를 담당하는 도화서도 갑오개혁의 발발과 근대적 제도의 변화로 폐지와 이속의 절차를 밟게 되었다.
도화서 폐지는 일찍이 외국의 문물과 사진술을 접한 개화파 인사들의 영향으로 볼 수 있으며, 그동안 왕실 내에서 도화업무를 담당하였던 것을 폐지하고자 하였던 것은 개화파의 근대적인 제도 개혁에 이어 도화서와 왕실 내에서 발생한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도화서는 폐지와 이속을 거치며 규장각에서 규장원으로, 장례원에서 예식원 그리고 다시 장례원으로 이관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도화서가 지속적으로 이관되어왔지만 도화업무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며, 화원들이 지속적으로 어진모사에 참여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포달(布達)에 따르면 오히려 도화업무를 맞던 주사(主事)의 인원이 14인에서 18인으로까지 늘어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도화업무를 담당하던 화원들은 광통교 일대로도 대거 등장하여 궁중 화풍을 민간에 알렸다. 한산거사의 「한양가(漢陽歌)」에 의하면, 이미 19세기 광통교 일대에서는 매매와 수집이 이루어졌고, 궁중화풍의 성향을 보이는 다양한 장식화들이 등장하였다. 주로 궁중 내에서 비의례용으로 통용되던 회화인, ‘백자도(百子圖)’,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 ‘요지연도(瑤池宴圖)’, ‘구운몽도(九雲夢圖)’, ‘삼고초려도(三顧草廬圖)’,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이 주류를 이루었고 궁중에서 감상이나 교훈을 목적으로 그려졌던 회화들이 민간으로 내려와 수요자의 취향에 맞게 그려졌다. 특히 길상(吉祥)의 의미를 담은 궁중장식화에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졌으며 민간으로 전해진 궁중화풍의 일부는 모방이나 수요에 맞게 점차 대중적으로 변하게 되었으며 민간화(民間畵)되었다.
조선 말부터 대한제국기까지 왕실의 회화 업무를 맡은 화원들은 공로로 관직이 승격되거나 국가로부터 사급을 받았다. 이들은 19세기 말부터 1910년 사이에 대부분 지방의 군수로 임용되거나 정3품까지 승격되는 등 관직을 얻게 되었다. 이렇게 관직을 얻거나 공로를 인정받은 화원 중에서 왕실이 아닌 화단으로 진출하여 활발한 활동을 한 인물들로는 채용신과 안중식, 그리고 조석진이 있다. 채용신은 본래 무과(武科)출신으로 초상화에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1900년 황실로 불려가 조석진과 나란히 그 기량을 선보였으며 안중식과 조석진의 경우 조선말에서 대한제국기까지 어진을 모사하였던 화사(畵師)였다. 이들은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관보』등 전해지는 사료를 통해 공로를 인정받았음이 밝혀졌으며 왕실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으나, 일제가 왕실에 정치적 외압을 행사하자 관직을 그만 두고 광통교 일대를 비롯한 화단으로 나아가 작품 활동을 하였다.
그들은 관직을 그만 둔 이후로 채용신은 호남지방으로 낙향하여 초상화를 그렸으며, 안중식과 조석진은 화단에서 도연명의 「도화원기」와 「귀거래사」를 주제로 한 청록산수를 그렸다. 이들의 회화에서는 공통적으로 궁중화풍의 유형이 나타난다. 채용신의 <관우상>은 일월오봉도가 배경으로 차용되었기 때문에 그림 속 관우의 권위가 왕과 동등한 지위에 준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또한 안중식의 <도원문진>과 <도원행주>, 조석진의 <귀래도> 는 이상향을 꿈꾸는 도원명의 문학적 소재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다가 작품 속에 적용된 톱니바퀴 모양의 산세(山勢)표현과 태점(苔點)은 전형적인 궁중화풍의 기법과 양식을 나타낸다. 또한 민간에서 그려진 <청록산수도>는 궁중 화풍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며 궁중화풍이 어떻게 민간화 되는지 살펴볼 수 있는 자료였다.
조선말 사회문화적 격변기 속에서 근대적 개혁을 모색하고자 하였던 개화파들에 의해 도화서의 폐지와 이속은 이루어졌지만, 왕실의 공식적인 행사나 전통적인 전례(典禮)를 위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또한 19세기 시전을 이루던 광통교로 왕실에서 도화업무를 맡았던 화사들이 진출하였고 이들이 제작한 작품 속에는 궁중화풍의 경향이 돋보였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의 회화가 민간에서 궁중화풍과 민간 수요 양상이 서로 결부되어 제작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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