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초기선교의 교육선교 [韩语论文]

资料分类免费韩语论文 责任编辑:金一助教更新时间:2017-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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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의 연구목적은 선교에 있어서 교육사역이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주었는지에 대해 알아보고 지금의 우리가 선교에 임할 때의 자세를 살펴보고자 함이다.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은 조...

본 논문의 연구목적은 선교에 있어서 교육사역이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주었는지에 대해 알아보고 지금의 우리가 선교에 임할 때의 자세를 살펴보고자 함이다.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은 조선이라는 나라에 다양한 선교전략을 가지고 왔다. 의료와 교육, 문화사역, 문서사역 등을 통하여 접근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쇄국정책을 주장하던 조선에 이러한 전략들을 펼치기는 쉽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육은 개화파의 활동과 함께 중요한 운동이 되었다. 조선 정부의 요청에 의해 정부가 원하는 대로 근대화를 위한 교육에 힘썼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교육을 통해 복음이 전파되기를 위해 노력하였다. 선교사들은 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여 보다 개선된 삶ㅇ르 살게 하였고, 학교 안에서는 예배를 드리고, 찬송가를 부르며, 한글로 된 성경책을 일게 하였다. 유교와 불교의 영향으로 미신적이고 샤머니즘적인 무속신앙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선교사들은 선교교육을 통하여 이러한 미신적인 것들을 제거하는데 노력했다. 초기 선교사들이 교육을 통하여 이 땅의 죽어가는 어린 영혼들에게 교육이라는 도구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고, 그들로 하여금 다시 복음 전도자로 자라게 한 것이다. 지금 우리의 선교사들도 세계 미전도 종족과 동남아, 아프리카, 중국 등에서 교육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고 있다. 기독교 박해 국가에서는 학교를 세우고 문화와 함께 교육을 통한 선교전략으로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기에 과소평가 될 수 없다. 교육선교는 선교전략의 핵심이며 교육은 선교 초기의 접촉수단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어져야할 우리의 선교적인 중대한 과업이다. 교육선교가 한국 초기 의료선교와 함께 중요한 핵심 축이 되었던 것처럼 지금도 교육은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핵심축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들에서 가르치시고 왕국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환과 모든 질병을 고쳐 주시니라.” (마9:35) 예수님의 사역은 가르치시고, 치료하시며, 전파하시는 것이었다. 이처럼 선교사역에 있어서 의료사역은 막대한 비중을 차지한다. 예수님의 복음 사역에 있어서도 의료사역은 빼놓을 수 없는 사역이었으며, 예수님의 사역 이후로도 세계선교 역사상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지금 제 3 세계의 나라에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기독교 병원이 하나라도 존재한다. 이것은 선교사들에 의하여 아프리카와 아시아, 남미, 그리고 한국에도 존재하게 되었다. 최초의 국립병원인 광혜원은 알렌(Dr, Horace N. Allen)의 간청으로 조선 정부의 허락을 받아 1885년 2월25일에 설립되었다.(김영재, 1992: 98) 당시 기독교를 박해하던 조선 정부에서 알렌 선교사를 통한 병원 설립은 역사적인 일이다. 1884년 12월 4일 개화파에 의한 쿠테타 사건인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명성황후의 조카이며 보수파의 우두머리인 민영익이 개화파의 칼에 맞아 쓰러졌는데, 알렌의 치료를 받게된다. 석 달 동안 알렌의 헌신적인 치료를 받고 회복되자 서양의학의 효과 왕실의 신임을 얻게 되어 알렌이 고종의 시의가 되었다. 알렌은 미국 공사관 대리공사 폴크(Gorge C. Folk)를 통해 한국정부에 서양식 병원 건립을 제의하였고 고종의 허락으로 서울 재동에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廣惠院, House of Extented Grace)을 개원하게 된다. 그러나 13일 후 일반백성들도 이용할 수 있도록 ‘제중원(濟衆院, House of Universal Helpfulness)’이라는 이름으로 개칭한다. 국왕에 의해서 공인된 이 병원을 통해서 많은 선교사들이 쉽게 선교활동을 할 수 있었다. 기독교의 전도를 절대로 금하는 정책을 고수하던 조선 정부는 학교 설립은 허가하지 않았고, 병원의 설립과 의료선교사의 활동에만 관대한 정책을 펼치게 되어서 선교사들은 제중원과 시병원을 통하여 고종황제를 비롯한 왕실과 고관들의 건강 관리는 물론 일반민중에 대한 진료 활동을 활발하게 벌렸고 공중보건 활동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광혜원이 서양의술의 보급을 통해 왕실과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기독교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한국인들에게 심어주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광헤원은 찾아오는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왕실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래서 의료선교는 민중과 왕실 양쪽의 마음을 사로잡는 계기가 되었다. 1885년 4월 5일 한국 최초 개신교 복음선교사로 들어온 언더우드 목사(Rev. Horace G. Underwood)가 교사 자격으로 이곳에 머물면서 우리말을 익히기 시작했고, 미국 북감리교 소속의 스크랜튼Dr. William B. Scranton)도 1885년 6월까지 이곳에서 의사로 활동하였다. 북장로교 선교부는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젊은 교수였던 에비슨(Dr. Oliver R. Avison)을 1893년 제중원의 책임자로 파송하였고 11월 제중원의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1894년 경영권을 인수한 에비슨은 병원의 대폭적인 개혁에 착수하여 불필요한 인원을 대폭 감축하여 경비를 절감하고 병원 내에서 도덕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생각한 의녀를 해임하였다. 1897년에 이르면서 종교 활동이 정기적이 되어 아침 예배와, 주중 기도회, 주일 정기예배가 병원의 환자들을 위하여 드려졌고, 1900년에는 매일 저녁 예배를 드렸으며 의사들과 간호사들은 환자들을 방문하여 전도하고 공개적으로 성경공부도 하였다. 그 때에는 전도 방법으로 개인 전도와 설교, 기도, 찬송, 성경읽기, 성경공부, 소책자 전도, 그리고 그림이 들어있는 전도지를 사용하였다. 1904년 에비슨은 “모든 선교사업은 일시적이고, 병원 사업도 장차 한국인에 의해 운영되어야 할 때가 올 것으로 예상되어 소수의 한국인 청년들에게 체계적인 의학 교육을 시키고자 힘껏 노력해 왔으며 이를 위하여 의사들은 언어공부에 몰두하였고, 교과서 편찬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였다. 그리하여 의학교가 문을 연지 10년만인 1908년6월3일 한국 의학교육 사상 최초의 졸업생 7명이 배출되었다. 이날 학위(Doctor of medicine and Surgery)를 받은 7명의 의사는 김희영, 김필순, 박서양, 신창희, 주현칙, 홍석후, 홍종은으로 대한정부로부터 1번부터 7번까지의 의사면허를 받았다. 그 후 에비슨은 내실있는 의학 교육을 위하여 4년 과정을 마친 1년 동안 각과를 돌며 실습하는 인턴제도를 처음으로 실시하였다. 1882년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1883년 미국 공사관이 서울 정동에 개설되면서 미국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부는 조선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시작하였다. 굳게 닫혀있던 한국선교의 빗장을 연 것은 의료선교와 교육선교였다. 이처럼 한국 초기 선교사역에서 의료와 교육은 언제나 함께 하였다. 한국 개신교 선교사들이 집중한 사역 중 하나가 교육을 통한 선교였다. 의료 선교 못지않게 한국개신교 선교사들이 정성을 기울인 것은 교육을 통한 선교였다. 미국 북 장로교 알렌 선교사의 입국에 앞서 1884년 6월27일 일본 주재 미북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가 조성을 방문하여 외아문 고위직에 있던 김옥균을 통해 고종황제로부터 교육과 의료사업을 허락 받았다. 감리교 선교사들은 입국과 동시에 교육과 의료사업을 시작하였다. 1885년 한국에 도착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도 교육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 쇄국정책에 의하여 교육은 하나의 위장된 전술에 불과했지만 어디까지나 선교정신이 내제되어 있었다. 1884년 9월에 내한하게 된 북 장로회 의사선교사 알렌은 현대 의학을 가르칠 학교와 병원의 필요성을 느껴 1885년 4월10일에 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광혜원을 개설하였다. 또 1915년 4월에 이르러 미국 북장로회, 남북감리회, 캐나다장로회 선교부 연합위원회의 관리 하에 서울 종로 중앙 청년회관을 빌어 연합대학의 설립인가를 얻기까지 「경신학교 대학부」라는 이름으로 개학하게 되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1885년 8월3일 영어를 배우려는 이겸라, 고영필 두 청년을 데리고 첫 수업을 시작하였다. 이듬해 1886년 6월8일 감리교 선교부의 공인을 받고 11월 미국 공사를 통하여 고종께 학교설립 허가를 얻어 7명의 학생으로 기독교학교로서 첫 출발을 하였다. 1887년 학생수가 75명에 이르러 서양식 교사를 지었다. 가장 먼저 교육사역을 시작한 것은 언더우드 선교사이다. 북장로교 선교사로 임명을 받은 언더우드는 1884년 12월16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 한 달 후인 1885년 1월25일에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일본에 도착한 언더우드는 이수정을 만나 한국어 공부를 하면서 한국선교에 대한 준비를 시작했고, 이어 1885년 4월5일 부활절 아침에 제물포에 도착하게 외었다, 언더우드가 도착할 당시 한국에서는 기독교의 포교활동이 금지되어 있었다. 한국 기독교학교에서는 한국어로 수업을 진행하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수업 매개체로 영어를 사용하였다. 기독교학교에서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였기 때문에 영어 습득을 목적으로 하는 학생들이 많이 모여들었지만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 결신자를 얻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일본과는 다르게 한국에서 미국장로교 선교부는 영어를 사용하지 않고 현지어로 수업을 진행하였다. 19세기 이후 조선은 국내 정치의 혼란과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점차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선교사가 처음으로 들어온 때는 1884년 알렌선교사가 서울에 들어온 것을 공식적인 기록으로 본다. 흥선대원군은 프랑스와 미국의 통상강요를 물리치고 쇄국정책을 유지하였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민씨 정권이 들어서면서 대외정책이 개방 되었다. 이어 1876년 2월 27일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하였으며, 이후 미국 등 서구 열강들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 정치적 보수세력에 의한 진보적인 세력의 숙청으로 쇄국주의 정책 속에서 외세로 취급되어 엄청난 핍박을 받았던 개신교는 문호개방을 통하여 결정적인 정치적 환경을 제공 받았다. 기독교가 들어오는 시기인 조선 왕조 후기의 양반층 사회는 심한 당쟁과 여러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농민, 상공업자 중심의 민중세계가 대동법, 균역법 등의 실시를 불가피하게 하고 지배층의 수탈을 극복해 나가는 한편 일정하게 농업 생산력과 유통경제체제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와 같은 민중 세계의 성장을 배경으로 하여 실학자들을 정점으로 하는 체제 비판적인 지식층이 어느 정도 형성되어 지배체제의 모순성을 발견하는데 눈 떠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의 ‘만민평등설’은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었다. 조선이 서양에 문호를 개방했다는 것은 서양의 문명과 종교에 문호를 개방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일본과 중국의 거센 압력을 이기려고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은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한국 기독교 선교가 선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모험적이고 선구적인 한국인들의 복음 수용과 전파를 통해 개척되었고, 그 바탕에서 선교사들이 내한하여 교회를 설립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배경에서 선교사들은 내한 즉시 적극적으로 접근해오는 한국인들을 신앙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토착인 목회자가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교수교사 과정 등의 측면에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기초 신학교육을 이수한 목회자를 양성할 수 있는 교육과정이 필요하였다. 1885년 아펜젤러와 스크랜톤은 1883년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갖게된 가우처(Jhon F. Goucher)에 의해 감리교에서 임명받아 오게 되었다. 그가 교육의 목표를 단순히 ‘인재의 양성’에 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거듭난 복음의 일꾼을 양성하는데 있었다. 1885년 내한한 아펜젤러와 스크랜톤은 아직은 국내 상황이 종교의 자유를 허용 받은 상황이 아니었기에 배재학당이나 시병원 같은 교육 및 의료기관을 통해 간접적인 방법으로 전도를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배재학당은 정부의 호의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기관이었기 때문에 복음전도의 중요한 매개체가 되고 있었다. 장로교의 경우 1885년 입국한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한지 3일만에 알렌 의사가 설립한 광혜원에서 화학과 물리학을 가르침으로 선교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1886년에 고아원과 고아학교로 언더우드 학당을 세웠다.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는 선조들의 말이 있다. 교육은 백년의 앞을 내다보고 신중하게 계획하고 실행해야 한다. 지금의 인재들 또한 과거의 교육을 통하여 존재하게 된 것이다. 교육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쉐마를 통하여 교육 명령을 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도록 하셨다. 구원 사역을 위해 오신 예수님은 그의 사역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보여주셨다. 오늘날에도 선교에 있어서 교육은 필수적인 것이다. 국내 사역분만 아니라 해외 선교사역에서 교육과 선교는 함께 추진되고 있다. 교육은 종교개혁자들로부터 시작하여, 근대 개신교 선교역사 초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한 선교적 도구로서 핵심적 위치에 있는 사역이다. 조선에 선교사들은 입국과 동시에 교육을 실시하여 근대식 교육 도입과 확산에 큰 공헌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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