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流《大東流柔術》의 張保皐(新羅明神)에 關한 硏究 (3)[韩语论文]

资料分类免费韩语论文 责任编辑:金一助教更新时间:2017-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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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張保皐(新羅明神)와 新羅三郞源義光(Sillasaburo Yosimitsch)과의 비교·분석을 통해 고류(古流) 大東流柔術(Daito-ryu Jujutsu)의 기원에 관한 연결성을 찾아 전통성을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 1차 사료인 고서(古書) 원전(原典) 기사(記事) 내용을 조사·분석·해석, 논의하였으며, 2차 사료로써 이에 관련된 서적 및 논문·인터넷 사이트 등의 다양한 자료를 참고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고류유술(古流柔術)에 보이는 신체기법의 이치(理致)와 사상(思想)이 무엇인가를 살피고, 나아가 한·중·일 삼국의 「武」에 대한 올바른 역사 가치관 정립에 시사점을 가지는 몇 가지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라시대의 화랑세기에는 선도(仙道), 무도(武道)라는 용어 이외에도 특정한 무술의 한 측면을 가리키는 ‘검도(劍道)’라는 용어까지 등장하고 있다. 화랑세기가 7세기경 성립되었다고 한다면 무도라는 전문용어의 발생지는 신라라 해야 마땅하다.
둘째, 張保皐(新羅明神)에 대한 명칭은《三國史記》와《三國遺事》에 궁복(弓福)이나, 궁파(弓巴)라고 되어 있다. 엔닌(圓仁, 慈覺大師)의《行記》와《續日本後紀》에서는 “장보고(張寶高)”라고 기록되어 있다. 《新唐書》 <新羅人張保皐>의 기록에는 무예와 학문의 깊이가 뛰어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그는 검을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을 뿐만 아니라, 활을 쏜 신궁(神弓)이고, 격투술(鬪戰)에서는 비호같은 몸놀림으로 패한 적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에서 벼슬을 하기 위해서는 필수과목으로 무술수련을 하였다.
셋째, 당대에는 많은 시합의 수요를 위해서 “소인원(小儿園)”이라는 각저(角抵)나 상박(相搏·相撲)과 같은 잡희를 할 인재를 양성하는 반자(班子)(극단 : 劇團)가 있었는데, 그중에는 “상박붕(相撲朋)”이라는 솔교(摔跤) 전문 인재들이 모여 있는 단체가 고증문헌의 원전(原典) 기사(記事) 내용에 보인다. 이러한 곳에서 張保皐(新羅明神)가 신체수련을 하였다.
넷째, 당대에는 한식절(寒食節), 상원절(上元節), 단오절(端午節), 원소절(元宵節), 전당관조절(錢塘觀潮節) 등에서 성대한 각저(角抵)의 각종 행사가 거행되었다. 실제 《角力記》원문기사 내용에서 살펴보아 알 수 있듯이 상대의 발목을 잡아 떨어트리는 내용에서 각저(角抵)를 사용한 잡고 넘기는 기술위주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이 각저(角抵)나, 상박(相搏·相撲)에 비해 고류(古流) 유술(柔術)에 보이는 大東流柔術은 전쟁에서 병법으로 쓰이는 신체기법들이 있다. 특히 무기에는 창술(槍術)·검술(劍術)·장술(杖(奉)術)·소태도(小太刀)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상대를 제압하는 포박술(捕縛術)과 연행술(捕縛術)의 병법기법들이 고류(古流) 大東流柔術에 존재하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다섯째, 고류(古流) 유술(柔術)에 보이는 大東流柔術의 근원에 있어서 대동이라는 명칭은 張保皐(新羅明神)시대 때 발해(渤海)와 신라(新羅)의 압록강 지역 경계선을 대동구(大東溝)라 부른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즉, 統一新羅시대의 大東流柔術에 관련된 지리 명칭인 대동구(大東溝)란 이름이 문헌에 등장한다. 오골강(烏骨江)의 《道理考實》에는 압록강구의 서쪽에 가까운 지역을 대동구(大東溝)라 하였다. 오골강에서 신라를 가는 데는 남으로 가고 발해는 압록강에서 북으로 들어간다. 통일 신라(新羅)와 발해(渤海)의 경계선을 대동구(大東溝)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두 나라가 같은 민족(民族)이기에 합친 명칭(名稱)으로 보인다. 統一新羅시대의 이후 조선(朝鮮) 시대의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서도 대동(大東)이라는 지리적 명칭이 사용된 점을 엿볼 수 있었다.
여섯째, 일본의 중파 적산궁(赤山宮) 지역은 張保皐(新羅明神)(Sillamyojin)의 후예인 신라계도래인(新羅系渡來人)의 거주지로 밝혀졌다. 그 이유는 張保皐(新羅明神)의 후예들은 고난을 이기지 못한 채 일부는 중국의 산동반도(山東半島)로 망명하였다. 또 다른 張保皐(新羅明神)의 후예들은 중파 적산궁(赤山宮)의 엔닌(圓仁, 慈覺大師)스님에게 요청하여 망명하는데, 이 사람들을 일본의 시가현(滋賀縣)으로 이주하여 신라계도래인(新羅系渡來人)의 거주지를 형성하였다. 1988년 시오자와 유타카인(塩澤裕仁)에 의하면 적성대명신연기(赤城大明神緣記)에서 명백히 밝혀진 것과 같이 張保皐(新羅明神)는 적산명신(赤山明神) 적신(赤神) 혹은 적신명신(赤神明神)이라고 불린다. 엔닌과의 밀접한 관계로 인하여 후에 적산명신(赤山明神)은 엔닌문도로부터 왕성한 숭배를 받게 된다. 다시 산문엔인문도(山門円仁門徒)·사문엔진문도(寺門円珍門徒)의 대립 즈음에 하여, 사문측이 그 수호신으로서 張保皐(新羅明神)를 숭배하고 공적인 후대를 요구하게 된다. 그 이후 일본의 무사도(武士道)에 있어서 신적인 존재로 숭배되었다.
일곱째, 고류(古流) 유술(柔術)에 보이는 대동류(大東流)라는 이름의 시조는 張保皐(新羅明神)의 후예인 신라계도래인(新羅系渡來人)에서 신라삼랑원의광(新羅三郞源義光)으로 전파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張保皐(新羅明神)가 당나라에 가서 무녕(武寧)의 군(軍) (藩鎭의 장교)으로 있었으며, 張保皐(新羅明神)가 산동반도 문등현 적산촌에서 지주장전(地主莊田)을 경영하고 대규모의 법화 사원을 지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엔닌(圓仁)도 그 영향을 받아 일본에서 시가현 오츠시에 중파 적산궁(赤山宮)을 설립하였으며, 신라명신(新羅明神)을 수호신으로 모시고 숭배하였다. 특히 다께다(武田) 가문의 시조는 신라사부로(新羅三郞)라는 이름의 무사이다. 다께다(武田) 가문의 시조가 신라사부로라는 것은 일본 무사의 뿌리가 신라계(新羅系)임을 부인할 수 없는 증거이다.
여덟째, 왜 미나모토 요시미쓰(源義光)가 본인의 성을 미나모토(源)가에서 신라사부로 요시미쓰(新羅三郞源義光)로 바꾸어야 하였을까? 이는 일본 오미(近江)지방의 비와 호수변 도시 오쓰(大津)의 사찰 미이데라(三井寺)에서 이에 관한 그 단서가 보인다. 신라사부로의 아버지 미나모토 요리요시(源賴義)는 1051년 전쟁에 출전하기에 앞서 미이데라(三井寺)의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 앞에서 신라명신(新羅明神)에게 승리를 기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아들 미나모토 요시미쓰(源賴義)를 신에게 바친다고 맹세한다. 그는 기원대로 승리를 거둔 후에 셋째 아들 미나모토 요시미쓰(源賴義)를 데리고 와서 성인식을 올린 후 아들 이름을 개명하였다.
아홉째, 중국의 명대 진원빈(陳元斌) 그가 일본유술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따른다. 이 권법(拳法)과 유술(柔術)은 전혀 다른 형태의 신체기법이기 때문이다. 또한 진원빈(陳元斌)이 삼포(三浦), 복전(福田), 기패(磯貝)의 일본인들에게 전래되었다는 것은 많은 문제점이 보인다. 그 이유는 진원빈(陳元斌) 그가 하남(河南)의 소림사(少林寺)에 들어간 시기는 1613년인데, 불교의 수행 및 권법(拳法) 모(鉾)、창(槍)、곤(棍)、청룡도(青竜刀)의 난행고행(難行苦行) 수련 후 1년 1개월 기간이 크나 큰 문제점이라 사료된다. 이에 반면, 전장 구미우찌(戦場組討)의 유술(柔術) 기법, 그 원류는 고대 스모(相撲)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무로마치(室町) 막부(幕府) 이전의 전장 구미우찌(戦場組討)는 오로지 고대 스모(相撲)에 의하여 행해진 격투무예이다. 이 무가스모(武家相撲)가 전장 구미우찌(戦場組討) 고류유술(古流柔術)의 원류임을 여러 고증문헌을 통해서 엿볼 수 있었다.
열 번째, 12세 말기에는 조정 정권의 공가(公家)로부터 무사 중심으로 전환된 시대이다. 이와 동시에 스모(相撲)도 가마쿠라 무사(鎌倉武士) 사이에 성행하여졌던 것이 전쟁터를 왕래하는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 부하 장수들이 전장 구미우찌(戦場組討)의 탈바꿈되어진다. 특히 고쿠조쿠 구미우찌(小具足組討)의 유술(柔術)기법들이 가마쿠라(鎌倉) 막부(幕府)와 센고쿠(戦国) 시대의 전쟁에 의해 성립되었다. 이 전장에서 무사들이 맨 처음에 하는 것은 먼 곳에 있는 적에게 반드시 활을 쏘았다. 그 다음에는 창과 도검으로 상대를 몸을 베고, 마지막으로 격투술로 승부를 결정하기에 유술(柔術)기법들이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전쟁이 없을 때에는 갑옷을 벗고 스하다(素肌) 맨몸 검술(剣術)과 유술(柔術)로 본위의 신체기법으로 다채롭게 발전하였다.
열한 번째, 당시 무사들의 무예 수련을 중요하게 여겼던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는 병사들에게 무가스모(武家相撲)를 장려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의 선조가 신라사부로 요시미쓰(新羅三郞源義光)이며, 이 가문의 조상은 신라계도래인(新羅系渡來人)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고쿠조쿠(小具足) 구미우찌(組討)의 일본 고류(古流) 유술(柔術)에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특히 이 무예가 훗날 고류(古流) 유술(柔術)에 보이는 大東流柔術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은 여러 고증문헌을 통해서 이를 엿볼 수 있었다.
열두 번째, 고류유술(古流柔術)의 타케우치류(竹内流)·오구리류(小栗流)·아라키류(荒木流拳法)·세이고우류(制剛流)·세끼구찌류(關口流)·시부카와류(渋川流) 기토류(起倒流)·요오신류(楊心流)·텐진신유류(天神真楊流)·아라키류권법(荒木流拳法) 등의 각 유파 기법특징을 살펴보면, 백타(白打), 권법(拳法), 포수(浦手), 취수(冣手), 화술(和術), 소구족(小具足), 기(氣), 요회(腰廻) 등의 명칭들은 약간 달라도 이 기법들 중에서 고류(古流) 大東流柔術의 기본이 되는 기법들이 존재하였다.
열세 번째, 타케우치류(竹内流)의 계서고어전기(系書古語伝記)에 보면, 인왕(人王) 56대 청화천황(清和天皇) 정순친왕(貞純親王) 경기(経基) 륙손왕(六孫王)라고 일컫고. 처음으로 미나모토(源氏)성을 받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특히 텐진신유류(天神真楊流) 가전서(家全書)에는 미나모토 마사노리(源正德)·미나모토 마사타시(源正足)라는 두 인물인데, 원씨(源氏) 성이 보인다. 또 세끼꾸지류(関口流)의 가계(家系) 계통의 청화원씨(清和源氏)로 계명하기 위하여 장남부터 차녀의 이름들을 팔만태랑의가(八万太郎義家)로 개명하였다는 문헌이 존재한다.
열네 번째, 張保皐(新羅明神)의 상징물과 신라삼랑원의광(新羅三郞源義光)·무전신현(武田信玄)(Takeda Shingen)·大東流合氣柔術(Daito-ryu Aiki Jujutsu) 종가의 상징물(깃발) 무늬가 동일하다. 특히 16세기 신라삼랑원의광(新羅三郞源義光)의 후손 중 다께다 신겐(武田信玄)은 전국시대의 불세출 무장으로 유명하다. 그는 군기(軍旗)에 신라삼랑원의광(新羅三郞源義光)이라 표기하였다. 여기서 張保皐(新羅明神) 위패를 모시던 절 적산궁(赤山宮)의 상징물과 군기에 있는 상징물, 그리고 大東流柔術의 본가 상징물 무늬가 같다는 것은 신라계(新羅系)임을 부인할 수 없는 증거이다. 그리고 다께다 신겐(武田信玄)은 기마전술에도 능했는데, 가마쿠라(鎌倉) 막부(幕府)를 세운 미나모토(源) 가문도 기마전술이 뛰어난 가문이었다. 이들의 선조가 되는 신라인들도 흉노 기마민족의 혈통인데, 그 피를 이어받는 신라계도래인(新羅系渡來人)도 기마전술이 능통했다는 기록이 고증문헌에 보인다. 이 지역은 신라계도래인(新羅系渡來人)의 거주지였으며, 원성사(園城寺)에는 신라선신당(新羅善神當)이라는 산신각(山神閣)이 있다. 그 뒤에는 신라삼랑원의광(新羅三郞源義光)의 묘가 있는데, 이는 토분을 쌓은 전형적인 統一新羅시대의 양식이다. 또한 일본 최초의 무사(武士)정권인 가마쿠라(鎌倉) 막부(幕府)가 성립(1198)되던 시기에 일본 천태종(天台宗)의 좌주(座主)였던 자원(慈圓)은 그의 저서 『우관초(愚管抄)』에서 무자(武者)를 일본어 발음인 「무샤」가 아니라 한국어의 발음 그대로인 무사(ムサ)라고 표기하였다.
열다섯 번째, 카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齊)의 민속화보(民俗畵報)에 보이는 무사도(武士道)의 그림들을 살펴보면, 고류(古流) 유술(柔術)에 보이는 大東流柔術의 기술들을 엿볼 수 있었다. 이를 보더라도 일본의 고류(古流) 유술(柔術)의 원류는 무사도(武士道)에 있으며, 그의 시조는 미나모토 요시미쓰(源義光)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후예(後裔)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의 부하 장수들이 전장 구미우찌(戦場組討)의 고류(古流) 유술(柔術)들을 더욱 발전시켰다.
이상의 살펴본 연구결과의 결론 도출을 종합해볼 때, 고류(古流) 유술(柔術)에 보이는 大東流柔術의 근원(根源)이 統一新羅의 장보고(張保皐) 후예(後裔)라는 사실은 유적 및 문헌자료 등의 사료를 통해 증명되고 있다. 특히 고류(古流) 유술(柔術)에 보이는 大東流柔術의 기원은 張保皐(新羅明神)의 후예인 신라계도래인(新羅系渡來人)임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張保皐(新羅明神) 후예(後裔) 신라계도래인(新羅系渡來人)들은 고류(古流) 유술(柔術)의 신체문화를 통해 이치(理致)와 사상(思想)을 담아 무사도(武士道)를 완성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고류(古流) 유술(柔術)에 보이는 大東流柔術의 張保皐(新羅明神)에 관한 전통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武」에 관련된 조사 분석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연구자는 이러한 주제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고류(古流) 유술(柔術)에 보이는 大東流柔術의 신체기법 이치(理致)와 사상(思想)을 살펴봄으로써, 현 시대의 무도인들에게 신체수련에 관한 「武」 신체지(身體知)의 새로운 가치관(價値觀)이 무엇인가를 전해주고자 하였다. 이와 아울러 한·중·일 삼국은 무도연구의 공조체계(共助體系)를 공고히 하여 張保皐(新羅明神)의 후예(後裔) 도래인(渡來人) 신라삼랑원의광(新羅三郞源義光)과 무전가(武田家)의「武」를 찾아 ‘온고지신(溫故知新)’과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이념아래 발전 및 계승과 보존에 힘써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統一新羅시대 張保皐(新羅明神)의 후예(後裔) 신라계도래인(新羅系渡來人) 「武」에 관한 재현과 더불어 전통성을 확립시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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