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 古代의 藥師如來 信仰과 圖像 硏究 (3)[韩语论文]

资料分类免费韩语论文 责任编辑:金一助教更新时间:2017-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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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신앙은 동방유리광정토의 주재자인 약사여래를 예경하고 의례를 행하면 질병이 치유되고 수명이 연장되며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현세이익적이고 대중적인 신앙체계로서, 동아시아에서 古代부터 오늘날까지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다. 이 논문은 한국의 삼국시대부터 고려 前期까지 전개되었던 약사신앙과, 이를 바탕으로 조성된 약사여래상을 다각적으로 고찰하여 그 특징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약사신앙의 근거가 되는 漢譯 약사경은 중국 남북조시대의『灌頂經』卷12「灌頂拔除過罪生死得度經」을 시작으로 隋 615년 達摩笈多의 譯本, 唐 650년 玄奘의 역본, 唐 707년 義淨의 역본 등이 차례로 나오면서 약사신앙을 확산시켰다. 약사경에는 약사신앙의 기본이 되는 藥師十二大願을 비롯하여 像에 대한 공양법, 續命幡燈法, 五色縷法 등의 약사의례가 실려있다. 이 의례들은 唐 654년에 한역된『陀羅尼集經』을 거쳐 不空 등 8세기의 밀교승려들에 의해 점차 密敎壇法의 형식을 갖춘 약사의궤로 정비되면서 현세이익적인 성격을 강화하였다. 약사신앙의 護國的 성격은 한국 고대의 통치자들에게 환영받아 국가적 차원에서 활용되었다. 삼국시대 신라 7세기 전반에 密本法師가 선덕여왕(재위 632~647)의 질병을 약사경 독경으로 치료한 이래 약사신앙은 신라왕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외적격퇴를 기원하며 국가적 차원에서 藥師道場이 개최되었다. 승려들의 경우, 통일신라 8세기에『本願藥師經古迹』를 집필한 太賢과 같이 약사경 주석서를 저술하거나, 眞表처럼 약사여래를 도량주로 삼아 수행하고 교화를 펼치는 등 약사신앙의 해석과 사회적 보급에 기여하였다. 고대 한국인들은 약사여래를 西方 극락정토의 아미타여래에 대응하는 東方佛의 대명사로 여겼다. 약사여래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은 阿閦如來를 동방불로 규정한 中期密敎(純密)의 방위불 개념과는 다른 것으로서, 불상 조성 등 약사신앙 활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고대 한국의 약사신앙은 경전의 틀에 구애받지 않는 형태로도 전개되었다. 984년 일본에서 편찬된 의학서인『醫心方』에 전하는『新羅法師方』과『新羅法師流觀秘蜜要術方』의 처방전은 약을 복용할 때 동방의 약사여래에게 의지할 것을 권장하거나 약사여래의 秘方을 담고 있는데, 통일신라의 약사신앙이 현실의 의약분야와 결합되어 그 범위가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9세기 초 애장왕(재위 800~809) 때 승려 順應과 理貞이 오색실로 왕비의 병을 고쳐주었다는 일화 또한 통일신라에서 五色縷法이 변형되어 독립된 치료법으로 행해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처럼 통일신라의 약사신앙은 토착화와 변용이 상당한 수준으로 이루어졌다. 한국 고대 약사여래상의 특징을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 비교론적인 관점에서 먼저 중국의 상들을 살펴보았다. 중국의 약사신앙을 경전의 내용과 연결지어 알려주는 예들은 돈황석굴의 藥師經變相 벽화에서 발견된다. 隋代 6세기 말의 약사경변상에서는 별다른 특징없이 남북조시대를 계승한 舊式 수인의 약사여래상이 그려지는 한편, 鉢盂形의 藥器를 지닌 새로운 약사여래상이 등장하여 특유의 도상이 시작되었다. 唐 7세기 중엽에는 왼손에 약기와 오른손에 錫杖을 든 약사여래의 입상이 그려지면서 지물을 든 약사여래 도상이 성립되었고, 이 두 종류의 지물은 차츰 坐像으로 확대 적용되었다. 이러한 모습의 상은 중국 약사여래상의 지물로 藥器를 규정한 唐 8세기 중반 不空 譯『藥師如來念誦儀軌』보다 1백여 년 앞선 것이어서, 도상이 의궤보다 먼저 출현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밖에 중국에는 관음과 지장보살을 협시로 하는 약사여래삼존상, 칠불약사경에 의거한 七佛藥師像 등 매우 다양한 종류의 약사여래상이 제작되었다. 우리나라 약사여래상 중에서 현존하는 가장 이른 예로는 삼국시대 백제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에 조성된 충청남도 태안마애삼존불 향우측(좌측)의 여래입상을 들 수 있다. 이 상이 든 약기는 꼭지달린 뚜껑있는 형태로서, 백제인들이 창안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 지역에서 출토되어 7세기로 편년되는, 오른손에 寶珠를 든 금동여래입상도 약사여래로 추정된 바 있다. 간혹 이 상들을 중국 6세기의 보주를 든 석가여래상과 비교하여 존명을 석가여래로 보기도 하나, 지물을 든 손의 좌우뿐만 아니라 형태와 양식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현 단계에서 석가여래로 단정짓기는 어렵다. 한국의 약사여래상은 통일신라 때부터 본격적으로 조성되었다. 통일신라의 약사여래상은 중국 唐과 달리 오른손에 석장을 쥔 예가 없고, 대부분 왼손으로 藥器만 들고 있다. 이 점은 중국과 구별되는 통일신라 약사여래상의 뚜렷한 특징으로서 하나의 도상적 전통으로 정착되어 고려시대까지 이어졌다. 통일신라 약사여래상의 존상구성방식은 단독상, 삼존상, 四面佛像의 하나로 나눌 수 있다. 단독상은 입상과 좌상으로 구분되는데, 입상은 藥器를 들지 않은 오른손의 위치와 수인을 기준으로 다시 몇 가지 형식으로 세분된다. 좌상은 오른손으로 촉지인을 맺은 상과, 오른손을 가슴 앞으로 올린 자세의 상도 있다. 이 중에서 오른손을 가슴 앞으로 올린 좌상은 단독의 원각상에는 거의 없고 부조상으로만 제작되어 도상에 따른 조각기법의 차이를 보여준다. 통일신라의 약사여래삼존상은 801년(애장왕2)에 제작된 경상남도 함안 방어산 마애불과 울산 어물동 마애불이 대표적이다. 둘 다 9세기에 공개된 장소에 조성된 대형의 상들로, 신라 下代에 약사신앙이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약사여래상이 지방민들의 예배대상으로 받아들여졌던 상황을 보여준다. 통일신라에서는 약사여래상이 거의 예외없이 四面佛像 중의 하나로 등장한다. 사면불상에서 약사여래상의 위치는 동방정토를 상징하는 東面으로 고정되어 방위판별의 기준점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존상구성은 동방에 阿閦如來像이 배치되는 중기밀교의 四方佛(五方佛)과는 구별되며, 당시 신라인들에게 잘 알려지고 유행했던 대표적인 신앙의 대상을 선택하여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통일신라의 사면불상에는 약사여래좌상뿐만 아니라 특이하게도 立像이 새겨졌는데, 이 자세 역시 좌상으로 구성된 밀교도상의 방위불과는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통일신라 사면불상의 약사여래상은 8세기 전반의 경주 남산 칠불암 사면석불과 8세기 중반의 굴불사지 사면석불 등 石柱形 바위의 東面에 새겨지기 시작하였고, 대략 9세기를 전후하여 석탑 1층 탑신의 동면에 자리잡았다. 석탑 사면불상 동면의 약사여래좌상은 9세기 전기에 오른손을 가슴 앞으로 올리는 자세가 대부분이었으나, 9세기 중반 이후에는 촉지인이 추가되었다. 아울러 9세기 전기에는 약사여래좌상의 반대쪽인 西面에 轉法輪印의 아미타여래상이 배치되어 東 약사와 西 아미타의 상징적인 대칭축을 형성했던 데 비해, 9세기 후반에는 이 구성방법이 해체되면서 동면의 약사여래상은 그대로 둔 채 남면에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좌상 또는 북면에 미륵여래의좌상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탑에 안치되었던 863년(경문왕3) 제작의 금동사리기 사면불상 역시 약사여래좌상은 동면에, 보관을 쓴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좌상은 서면에 배치되어 9세기 후반 석탑 사면불상의 존상구성 변화와 비슷한 양상을 보여준다. 동면의 약사여래상을 제외한 사면불상의 나머지 상들이 이와 같은 가변성을 띠는 것은 정형화된 밀교도상의 고착성과는 구별되는 통일신라 사면불상의 독자성이라 할 수 있다. 통일신라 때 완성된 한국 고대 약사여래상의 도상은 고려 前期까지 그 전통이 이어졌다. 이 시기의 약사여래상은 기본적으로 통일신라 상의 형식을 따르면서도, 자세나 착의방식 등의 세부형식은 다양하게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는 고려 전기 불교조각의 지역적인 다원화 현상과도 관련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면불상의 경우, 평양 영명사 석조불감이나 강원도 원주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등 석탑 이외의 석조물로 표현의 범위를 넓히고 도상의 부분적인 변화가 있었으나, 동면에 약사여래상을 새기는 기존의 배치방식은 지속되었다. 고려 전기에는 통일신라에 없었던 새로운 종류의 약사여래상이 출현하였다. 경상북도 김천 금릉 신안동 석조여래입상과 전라북도 남원 만복사지 석조여래입상 광배 뒷면의 선각여래입상은 한 손에 淨甁을 들고 있는데, 도상적으로 흔치 않은 예이다. 정병을 든 여래상의 초기 예는 唐 8세기의 금동불에서 확인된다. 이 특이한 도상의 경전적 근거는 주문을 가한 물을 마시면 病苦가 없어진다는 義淨 역(707년) 七佛藥師經의 내용에서 찾을 수 있다. 정병을 든 약사여래입상은 발해나 거란(遼) 등 북방 지역을 거쳐 고려 전기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며, 이 시기 약사여래상의 계보가 통일신라에 비해 다양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한국 고대 약사여래상의 도상적 특징을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자세와 지물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약사여래상 자세의 특징은 입상보다는 좌상에서 잘 드러나는데, 좌상은 8세기 전반부터 조성된 오른손을 가슴 앞으로 올리는 상과, 8세기 후반 이후에 등장한 촉지인의 상으로 대별된다. 오른손을 가슴 앞으로 올린 자세는 중국과 일본의 약사여래좌상에도 자주 사용되어 국제적인 보편성을 띠는 데 비해, 촉지인은 오른발을 위로 두는 吉祥坐의 좌세와 함께 한국의 약사여래좌상에서 집중적으로 보이는 차이점이 있다. 한편, 한국 약사여래상의 주요 지물인 藥器는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容器類 이외의 寶珠形 약기는 현재 전하는 중국과 일본의 약사여래상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 한국 고대 약사여래상 약기의 도상적인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약사신앙은 개인과 집단의 안녕과 행복을 제시하는 불교의 대표적인 대중신앙체계로서 현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그 핵심과제이다. 한국 고대의 약사신앙은 漢譯 약사경에 기초하면서도, 의례의 실천은 경전 내용 그대로가 아니라 여러 방식으로 응용되는 등 독자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도상적인 면에서는 한국의 약사여래상이 중국의 영향을 선별적으로 수용한 결과, 지물로 錫杖 없이 약기만 드는 상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좌상에서는 여래의 正覺을 상징하는 촉지인의 자세가 주류를 이루는 것이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통일신라 8세기부터 사면불상의 東面에 일관되게 배치되었던 약사여래상은 다양한 존상들과 조합되면서 중국이나 일본의 中期密敎 도상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계보를 형성하였다. 한국 고대의 약사신앙과 약사여래상은 동아시아적인 보편성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나름의 특수성을 강화시켜나가며 한국 고대 불교문화의 독자적인 전개에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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