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상들은 태(胎)를 태아를 키워낸 생명줄로 인식하였다. 아기를 출산한 후에 태는 그 아이의 장래 운명을 좌우한다고 생각하여 매우 소중하게 다루었다. 과거 왕실에서 자손이 태어나... 우리 조상들은 태(胎)를 태아를 키워낸 생명줄로 인식하였다. 아기를 출산한 후에 태는 그 아이의 장래 운명을 좌우한다고 생각하여 매우 소중하게 다루었다. 과거 왕실에서 자손이 태어나면 명당이나 길지에 태를 땅에 묻고 태실을 조성하였다. 태는 태어난 아기의 생명선이자 시작이라 여겨 중요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태실이란 태봉의 정상에 일정한 의식과 절차를 거쳐 태를 땅에 묻고 조성한 시설을 말하는데, 무덤과 비슷하여 태묘, 태실묘 또는 태실릉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태실의 기원은 신라시대 김유신 태실에서부터 시작되었고, 당시 민간까지도 태실을 만들었다. 왕실에서 태실을 조성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고려에서는 국왕과 왕자의 태실을 만들어 유지하였다. 이렇게 이어 내려온 태실의 문화는 조선 왕실에 이르러 국왕을 비롯하여 그 대상과 범위가 확산되고 정착하여 오늘날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 왕실 자손의 탄생은 국가의 번성과 밀접하게 관련된다고 믿었다. 이에 왕실의 여인이 아기를 출산하는 과정을 의례화하였고, 출산 시 왕실 아기의 태를 묻어 보호하면 태주가 무병장수한다고 믿어 풍수사상에 의해 전국 각지에서 길지를 선택하여 태실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 왕실의 태실은 우리나라 민족이 가진 생명 존중 사상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조선은 초기부터 왕실의 태실을 조성하는 범위와 절차를 제도화하였다. 우선 대상의 경우 세종은 왕과 왕세자만 조성하던 태실을 모든 왕자까지 확대하였고, 성종은 그 범위를 딸까지 허용하였다. 다음 장태와 관련된 절차나 의례는 세종 때 체계적으로 정립시켰다. 게다가 태실지는 능묘와 마찬가지로 풍수사상의 영향을 받아 선정하였으나, 지표면 위로 불룩 솟아오른 곳[突穴]이어서 무덤을 조성하는 음택 풍수와는 달랐다. 이러한 태실은 조선 전기에는 하삼도에 집중되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거의 전국으로 확산되는 추세였다. 한편 왕자와 공주까지 모두 태실을 조성하면서 태를 묻을 공간이 부족하게 되어 이에 대한 개선안을 마련하였다. 산등성이 하나에 여러 개의 태실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조선에서 왕자녀가 태어나면 아기태실(阿只胎室)을 조성하였는데, 오직 국왕만은 가봉태실(加封胎室)까지 조성하였다. 전자는 왕실에 아기가 태어나면 그 태를 태항아리에 태지석과 동전 및 금·은판 등과 함께 담아 태주의 무병장수와 자손 번창을 기원했고, 이것들을 모두 석제 태함에 넣어 묻은 다음 작은 봉토를 만들었다. 그 앞에는 아기태실을 조성한 연월일을 적은 아기씨태실비를 세워 조성하였다. 이러한 조선왕실의 아기태실은 왕자녀의 숫자만큼 조성되어 현재 200여 기가 유존하고 있다. 반면 후자는 왕자아기 중 국왕으로 즉위한 것을 기념하여 아기태실 대신 국왕태실로 조성하는 것이었다. 이에 아기태실의 봉토를 편평하게 하고 아기태실비를 파묻고 여기에 국왕태실을 기념하는 각종 석물을 더하여 장식하였다. 곧 봉토 대신 중앙태석을 세우고 그 주위는 팔각 난간석으로 둘렀고, 아기태실비 대신 가봉태실비를 세웠다. 513년간 조선을 다스린 국왕은 27명으로서 이들의 국왕 태실은 현재까지 대다수가 유존하고 있다. 이러한 국왕 태실은 왕자아기로 태어나서 조성한 아기태실과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조성한 가봉태실을 함께 공존하였다. 더욱이 이것들은 국왕의 출생과 즉위에 관련한 기념비적 유물이어서 그것을 조성한 절대연대가 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현존하는 27기 조선 국왕의 태실을 비교 분석한 결과 아기태실의 태항아리와 아기씨태실비, 가봉태실의 가봉태실비와 중앙태석 등의 구조와 형태 및 장식 등은 크게 4시기로 나뉘어 시기별 양식적 특징을 보였다. 아기태실의 아기비나 가봉태실의 중앙태석이나 사방석, 팔각난간석 및 가봉비 등 조선 국왕의 태실 석물은 왕릉의 석조미술과 형태적으로 유사하였다. 이러한 조선 왕실의 태실 석물은 시기에 따라 전기, 중기, 후기, 말기의 각 4시기로 변화 발전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이것들은 조선 도자사나 왕릉 석물 조각사의 흐름과 일치하여 앞으로 이 분야의 연구가능성이 높다. 특히 조선 제13대 명종 태실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16세기 국왕 태실로서, 조성 당시의 원형을 잘 간직한 채 충남 서산시 태봉리의 원래 위치에 현존하고 있어 연구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주지하다시피 명종은 1534년에 중종과 문정왕후의 아들로 태어나 1538년 그의 태를 묻은 아기태실이 조성되었다. 1545년 조선의 제13대 국왕으로 즉위한 이듬해인 1546년 아기 태실 위에 중앙태석과 난간석을 세운 다음 가봉태실비를 세워 국왕이 된 것을 기념하였다. 이후 200여 년이 지나 숙종대에 가봉태실비가 훼손되자 그것을 고쳐 1711년 가봉개수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이렇게 명종 태실을 조성한 과정이나 이후 조선 왕실에서 관리하고 수리한 과정 등은 『조선왕조실록』이나 『태봉등록』 등의 여러 문헌에 자세히 밝혀져 있었다. 이를 통해 명종 태실은 조선시대 내내 국가에서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때문에 명종 태실과 관련된 석조물들은 현재 원래 그 자리에 현존하여 역사적 의의를 갖는데다가, 500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조형적으로나 미적인 가치도 우수하다. 이처럼 현존하는 명종 태실의 석조 유물은 태실비 3점과 태실 석물 3종류로 구분된다. 전자는 조선 전기와 후기의 비석들과 비교 분석하였고, 후자는 비슷한 시기의 왕릉 석물들과 비교하여 시대적 양식 특징을 밝혀 보았다. 그 결과 알게 된 사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명종 태실비는 아기씨태실비, 가봉태실비 및 가봉개수비 3점이었다. 이들 3종류의 비석은 조선 초기 제7대 세조 태실과 조선 후기 제22대 정조 태실의 비석들과 비교하여 시기적 특징을 분석하였다. 우선, 아기태실비는 구조와 장식에서 시대적 변화가 엿보였다. 조선 전기 세조의 아기비는 비수(碑首)와 비면(碑面) 및 비대(碑臺)가 일체형이지만, 명종과 정조의 것은 상하가 분리되어 비수가 별도로 만들어졌다. 또 세조의 비수는 끝 부분을 모죽임한 규형(圭形)에 초화문이 장식되어 있지만, 명종과 정조의 것은 반원형 비수에 연화문이 장식되어 있었다. 정조의 아기비에는 비대한 연봉이 있지만 명조는 분실되었다. 비대는 모두 사각형인데, 정조의 비대는 최근에 복원되었다. 다음 가봉태실비 또한 귀부와 비신 및 이수의 형식이나 문양이 조선 전기와 중후기로 변화되었다. 세조의 귀부는 육각문 위주로 거북이가 엎드린 형상이고, 이수는 앞면에만 2마리 용을 새겼다. 명종과 정조의 귀부는 거북이 머리를 들어 올리고 거북 등 위에 연잎과 육각문이 있으며, 이수 전체에 2마리의 용이 서로 마주보며 여의주를 다투는 문양을 배치하였다. 비문에 있어서도 명종의 것은 ‘主上殿下/胎室’ 그리고 뒷면에는 중국연호와 관련시켰고, 제작시기에 해당되는 연호와 연월일을 새겨 넣었다. 한편 명종 태실의 가봉개수비는 숙종대에 수리하면서 조성한 것이어서 조선 중기보다 조선 후기의 특징을 많이 엿볼 수 있었다. 둘째, 명종 태실의 석물은 난간부, 기단부, 태실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태실 석물 전체적으로 왕릉의 석물보다는 개수가 적고 규모가 작았으나, 구조적이나 형태적인 면에서 유사한 점이 많았다. 이에 명종 태실과 조성 시기가 유사한 제12대 인종 효릉이나 제13대 태주의 무덤인 명종 강릉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았다. 우선, 태실 석물의 난간부와 기단부는 왕릉의 것들과 구조적으로 일치하였다. 난간석의 주석, 동자석, 죽석이 있다. 기단부의 경우 형태와 문양에서 공통점이 있으며, 크기나 세부적인 모양에서 차이가 엿보인다. 다음으로 태실의 중앙태석은 왕릉의 장명등과 비교하면 형태적으로 상하의 개첨석과 대석은 유사하나, 양자의 용도가 달라 중앙 부분만 차이를 보였다. 이처럼 조선 왕실의 태실 중에서 중기에 만들어진 명종 태실의 석물의 양식을 전후의 태실과, 왕릉의 비교를 통해 자세히 알아보았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조선 왕실의 태실과 명종 태실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되고, 조선 국왕의 태실이 왕실의 문화유산으로 자리 매김하고 더 나아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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