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 雍正帝 정치사상의 시각적 구현에 관한 연구 : 他者化의 관점에서 본 華夷觀과 궁정회화를 중심으로 [韩语论文]

资料分类免费韩语论文 责任编辑:金一助教更新时间:2017-04-28
提示:本资料为网络收集免费论文,存在不完整性。建议下载本站其它完整的收费论文。使用可通过查重系统的论文,才是您毕业的保障。

본 논문의 목표는 다민족 간 통합을 표방하면서도 청(淸) 제국에 속하는 다민족 문화를 의도적으로 타자화(他者化)하였던 청 옹정제(雍正帝, 재위 1722~1735)의 정치사상 및 화이관(華夷觀)을 ...

본 논문의 목표는 다민족 간 통합을 표방하면서도 청(淸) 제국에 속하는 다민족 문화를 의도적으로 타자화(他者化)하였던 청 옹정제(雍正帝, 재위 1722~1735)의 정치사상 및 화이관(華夷觀)을 살펴보고, 이것이 그가 제작 및 후원하였던 궁정회화 작품 속에 시각적으로 구현되었음을 확인하는 데 있다. 만주족(滿洲族) 출신의 청 제국은 입관 후 끊임없이 명말청초(明末淸初)의 한족(漢族) 유민(遺民)들로부터 정권의 정통성을 공격받았다. 한족 문인들은 출생 지역과 민족을 기준으로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을 구분하고, 중화는 군사적으로 약세이더라도 문화적으로 우월한 정통(正統)이고 이적은 군사적으로 강세이더라도 문화적으로 열등한 이단(異端)이라는 가치 프레임을 씌워 북방 이민족 출신인 청 제국의 중원 지배를 부정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즉위한 옹정제는 대일통(大一統)을 이룬 청 제국에서 화이의 구분은 무의미하고 오직 군신의 관계만이 유의미하다는 ‘군주본위(君主本位)’의 입장에서 모든 민족을 신민(臣民)으로 포용하는 언설을 하였다. 옹정제는 또한 한족 문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유학(儒學)을 수용함과 동시에 강남의 한족 문화를 사치와 향락으로 인해 부정부패하여 명을 망하게 만든 원흉으로 몰아세우고 그와 대립되는 소박하고 질박함을 만주의 법도이자 청을 일으켜 세운 성인(成因)으로 내세우는 등 한족 문화를 타자화하는 ‘만주본위(滿洲本位)’의 민족 정책을 고수하였다. 한편 중국 내지(內地)의 한족 외에도 동북 및 내륙아시아의 몽골과 티베트를 위시한 다민족 세력 또한 청의 안정적인 통치에 걸림돌이 되었는데, 이에 옹정제는 티베트 불교의 종교적 권위를 이용하였다. 그는 티베트 불교를 수호한다는 명분을 들어 그들에 대한 직접 지배권을 강화시켰으며 마찬가지로 타자화 작업을 계속했다. 더불어 강희(康熙) 말엽 황위 쟁탈전을 경험했던 옹정제는 만주족 황실 내부의 집단 세력화를 방지하기 위해 붕당(朋黨) 근절의 명목 하에 황자 세력을 탄압하고 그들까지 만주족 형제이기 이전에 자신의 일개 신하로 타자화하였다. 이처럼 자신 외에 모두를 신민(臣民)으로 타자화하였던 옹정제의 군주본위 정치사상 및 화이관은 궁정회화를 통해 시각화되었다. 18세기 청대(淸代) 황제들은 화가의 선발과 작품의 제작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자신의 정치 이상을 궁정회화에 반영하였다. 그 과정에서 황제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표현 양식과 회화 장르가 발전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옹정 연간에는 중서합벽(中西合璧)의 화풍이 만주의 독자적인 표현 방식으로 부상하였고 이를 활용한 회화 장르로서 행락도(行樂圖)가 탄생하였다. 만주족 황실까지도 타자화했던 옹정 연간에는 만주족의 정체성을 과시하는 작품이 드물고 대신에 타민족 문화를 묘사하는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작품 속에 묘사된 한족 문화는 옹정제 자신이 황제로서 계승한 중화문명의 이미지가 대부분인데 이는 옹정제가 청 제국의 일부로 ‘허락한’ 한족 문화로, 결코 만주 문화와 동급이 될 수 없는 2등 문화에 불과했다. 한편 작품 속에 묘사된 다민족 문화 역시 옹정제로부터 타자화된 다민족 문화의 이미지로, 옹정제가 생각하는 대청제국의 영역 범위와 다민족에 대한 회유와 협박이라는 옹정제의 이중적인 정치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결국 옹정 연간의 궁정회화는 대청제국의 절대군주로서의 옹정제의 자신감과 타민족에 대한 전유(專有) 의식, 그리고 어디까지나 만주를 엘리트 지배계층으로 하는 그의 정치적 이상을 투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This study examines Emperor Yongzheng(雍正, 1722~1735)’s political thought and its visualization in therms of ‘Othering(他者化).’ The Emperor Yongzheng pursued the doctrine of ‘The Great Unity(大一統)’ and seemed to embrace multi cul...

This study examines Emperor Yongzheng(雍正, 1722~1735)’s political thought and its visualization in therms of ‘Othering(他者化).’ The Emperor Yongzheng pursued the doctrine of ‘The Great Unity(大一統)’ and seemed to embrace multi culture, but on the other, he deliberately otherized other culture. The Qing(淸) Empire built by Manchu(滿洲) constantly attacked because of their political legitimacy. Han(漢) refugees refused to serve the Qing Empire because they thought that although Manchu their military is powerful, their culture is barbaric. Such an idea was based on the Sino-barbarian dichotomy(華夷觀) that differentiated culturally advanced ‘Hua(華)’ from culturally or ethnically backward ‘Yi(夷).’ After becoming emperor, Yongzheng argued that both Hua and Yi were now a part of the same family under the Qing which already had created ‘The Great Unity.’ According to him, all people in the Qing territory were his minister(臣), regardless of ethnic, it sounds like he treated every ethnic equally. The Emperor Yongzheng accepted Confucianism to conciliate Han refugees although he criticized Han culture as hedonism and debauchery which had destroyed the Ming(明) dynasty, then revered simplicity and thrift as ‘The Manchu Way’ instead. In addition, the Emperor Yongzheng used authority of Tibetan Buddhism when dealing with multiethnic who had lived in Inner Asia, expecially Mongol and Tibet. In the name of Tibetan Buddhism’s guardian, he tighten his hold on Inner Asian, and otherized them. Furthermore, the Emperor Yongzheng who had experienced a scramble for the throne otherized even his Manchu brothers as a minister to prevent them from grouping for political authority. The othering of the Emperor Yongzheng like this can be found in court paintings. In 18th century, the emperors of the Qing intervened aggressively in selecting painters and producing the paintings to reflect their political ideals in the paintings. As a result, new trends had been created in 18th century, and they used to making Manchu their own images. The Emperor Yongzheng preferred to produce the court paintings which describe Han and multi culture which already had been otherized by himself. For example, Han and multi culture which had been represented in these paintings was the second-class culture the Emperor Yongzheng ‘permitted’ as a part of the Qing Empire, and it is definitely could not be Manchu culture, the first-class culture. In conclusion, the symbol and metaphor in the court paintings of the Qing Empire show that the Manchu emperor Yongzheng regarded other culture as a possession and visualized his political desire to make the Qing Empire as The Great Unity whose ruling class had been made up of elite Manchu through the court paintings.

韩语论文范文韩语论文范文
免费论文题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