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상대 문헌에 나타난 진구(神功) 황후론 (2)[韩语论文]

资料分类免费韩语论文 责任编辑:金一助教更新时间:2017-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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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상대 문헌나타난 진구(神功) 황후론 진구(神功) 황후 전승의 초출(初出)은 통설대로 712년 편찬된 『고지키(古事記)』「주아이(仲哀)記」를 통해서이다. 이후 『니혼쇼키(日本書紀)...

일본 상대 문헌나타난 진구(神功) 황후론 진구(神功) 황후 전승의 초출(初出)은 통설대로 712년 편찬된 『고지키(古事記)』「주아이(仲哀)記」를 통해서이다. 이후 『니혼쇼키(日本書紀)』「주아이(仲哀)紀」․「진구(神功)紀」 그리고 「하리마노쿠니(幡磨國)」․「히젠노쿠니(肥前國)」․「히타치노쿠니(常陸國)」 등의 『후도키(風土記)』와 「후도키 일문(逸文)」에 수록돼 있다. 세 문헌의 성립에는 일본의 오래된 숙원이었던 율령제 국가의 완성이 배경이 되고 있다. 중국을 벗어난 독자적인 일본 구축과 천황제 국가의 면모를 대외적으로, 특히 중국에 알리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구 황후 전승에는 그런 정치적 의도가 잘 드러나 있다. 진구 황후 전승을 오진 천황의 왕권신화로 볼 때 진구 황후의 모든 사적(事績)은 복중(腹中) 태자인 오진 천황의 업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오진 천황은 복중 태자로서 신탁을 통해 천황 옹립의 당위성을 부여받고 ‘신라 정벌’, ‘삼한 복속’ 그리고 국내 정적(政敵)을 축출하는 과업을 달성하게 된 것이다. 『고지키』, 『니혼쇼키』, 『후도키』의 진구 황후 전승은 이런 기본적인 구성에 충실하고 있다. 하지만 대외 정사(正史)의 성격을 띤 『니혼쇼키』「진구(神功)紀」의 기록은 이 외에 신라․백제․가야 7국에 대한 대한교섭기사를 더하고 있다. 특히 이런 기록들은 편년체로 기록돼 있고, 중국사서인 『위지(魏志)』․「진기거주(晉紀居住)」와 『백제기(百濟記)』를 인용하여 사건의 실재를 부각시키고 있다. 물론 이런 기록들은 동시대를 기록한 한국의 『삼국사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기록으로 한일 연구자들 사이에 논란의 쟁점이 되는 부분이다. 진구 황후 전승이 주목 받는 또 다른 이유는 그의 계보적 특성에 기인한다. 『고지키』와 『니혼쇼키』는 진구 황후 모친(母親) 계보의 6대조를 신라에서 도래한 ‘아메노히보코’라고 기록하고 있고 그 계보가 진구 황후의 아들인 오진(応神) 천황으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아메노히보코’에 대한 두 문헌의 입장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고지키』가 「오진記」를 통해 오진 천황으로 이어지는 ‘아메노히보코’의 계보를 소개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니혼쇼키』는 「스이닌紀」에 4대 ‘다지마모리(田道間守)’나 2대 ‘기요히코(淸彦)’에서 단절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계보의 진위 여부는 차치하고 「오진記」의 계보는 오진 천황이 천황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는 데 있어 선진적인 문화와 기술을 보유한 도래계 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음을 보여 준다. 이런 선진적인 문명에 대한 것은 ‘아메노히보코(天之日矛)’ 전승의 ‘신보(神寶)’를 통해 소개되고 있다. 「스이닌(垂仁)紀」는 『니혼쇼키』 전반에 팽대했던 번국관념에 의해 ‘아메노히보코’의 계보를 불이익으로 여겼을 것이다. 이처럼 두 문헌은 상반된 정치적 의도를 취하고 있다. 『후도키』에는 ‘아메노히보코’와 오진 천황을 혈연으로 매개할 지역전승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진구 황후, 오진 천황, ‘아메노히보코’ 전승이 하리마 등의 지역에 공통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세 전승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은 진구 황후 전승을 통해 중국의 아시아에 대한 문화적 영향력-백제로부터의 문물의 도입, 신라에 대한 열세-에 대해서 군사적․정치적으로 열등감을 위로받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관념이 진구 황후 전승을 통해 표출되고 있다. 진구 황후 전승의 ‘신탁’, ‘복중 태자’, ‘신라 정벌’, ‘삼한 복속’ 전승은 전승의 성립 이후 오늘날까지 각 시대의 위기 때마다 회상되며 일본인들의 위로가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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