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eatest part of Baek-seok's poems is that they are an expression of Korean language and Korean folk customs. He rarely used Chinese letters or foreign words in his poems but instead used a dialect of northern Pyung-an province in North Korea. The...
The greatest part of Baek-seok's poems is that they are an expression of Korean language and Korean folk customs. He rarely used Chinese letters or foreign words in his poems but instead used a dialect of northern Pyung-an province in North Korea. The dialect which Baek-seok used in his poems reflected his ardent wish to help the Korean traditional community recover from the damages caused by Japanese colonialism. Japanese colonial policy prohibited Korean people from speaking and writing their own language. (Poet's name) tried to show the lives and language of ordinary Korean people in his poems very realistically, and his worries about the collapse of Korean traditional agricultural community during the colonial era.
Stories in Baek-seoks poems made readers interested in his works because they showed a different world from the current world readers were experiencing. The stories looked back to more traditional times through young Baek-seok's eyes. His earlier memories consisted of peaceful and lovely experiences without any kinds of troubles or problems. He tried to rearrange his beautiful memories in a way that they would be best expressed in his poems. Also Baek-seok depicted his earlier life very actively in a way that brought it to life in the minds of the readers. He wanted to show, through his writing, his passion to call back the memories of ordinary Korean people who were suffering from the Japanese suppression.
The more he wanted to show the characteristics of Koreans, the better his skills for expressing his feelings became and this can be seen in his poems. Baek-seok wasn't satisfied with his early poems that only expressed peaceful childish life. Instead, he created the secluded local villages in his poems where Korean folk customs were still alive. He used the traditional Korean living conditions that people inherited from their ancestors in the village as a stage in his poems.
The aim of Baek-seok's poetry was totally different from the main stream of 1930's Modernism. He can be called a pioneer of Korean poetic history because he created his own unique poetic world. The underlying aspect of his poetry was an awareness of his membership in a community, that is, his national relationship inherited as a member of the Korean people. The communal society highlighted in his poems was part of his strong adherence to the goal of finding the real experience of Korean's under the tough Japanese colonial era. Furthermore it can be said to be his intention to add national identity to the Korean people.
As one of the poets of the colonial era, Baek-seok has to be recorded in the history of literature. He resisted Japanese colonialism by expressing Korean culture, history, and national eternity in his poems. Another element of his works that distinguished him in the poetic world from other Korean poets is the difference in spirit expressed in his work compared to other poets. During the colonial era other poets expressed their sadness and fatalism over the ruined nation in their poems. But Baek-seok wanted to give Korean people the hope and energy to get back the nation from Japan through his poems. His unique creative power was another important thing in the history of Korean literature. So Baek-seok was a representative of Korean literature, and a great poet from the mid 1930's to 1940's.
백석시의 두드러진 특징은 토착어의 표출과 민속적 세계이다. 그의 전 작품에서 한자어나 그 밖의 외래어의 사용은 극히 제한되어 있으며 그의 시에서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평북방언...
백석시의 두드러진 특징은 토착어의 표출과 민속적 세계이다. 그의 전 작품에서 한자어나 그 밖의 외래어의 사용은 극히 제한되어 있으며 그의 시에서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평북방언들이 노골적으로 표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그 평북방언들은 매우 깊이 있고 다양하게 구사되고 민중들의 삶 속에서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면서 전해 내려오는 풍속을 잘 담아내어 잃어버린 공동체에 대한 회복의 열망이 표출되었다고 본다. 또한 그의 작품 속에는 일제 하 농촌 공동체의 몰락을 염두에 두고 당대의 민족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 내고 있다.
백석의 시를 대할 때 흥미를 느끼게 되는 것은 어린이의 눈을 통해 회상되는 공간이 있고 그 공간 안에는 짤막한 이야기가 게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유년의 세계는 일체의 현실적 갈등이 배제된 밝고 투명한 평화의 공간으로 제시되며, 그는 다만 유년의 체험을 감각적으로 재구해 내는데 진력하고 있다. 이와 아울러 그는 유년의 시선으로 포착되는 삶의 모습을 매우 생동감 있게 그려내어 인간의 호흡과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시들을 발표하고 있는데, 이러한 시편들에서도 역시 인간적 삶이 훼손당하던 세계 속에서 진정한 삶의 모습을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이 담겨 있는 것이다. 백석은 유년의 축소된 화해로움에서 한 걸음 나아가 우리 민족의 삶의 체취에 의도적으로 접근한다. 그리하여 마련된 공간이 우리 민족의 원형적인 모습이 아직도 건재하고 있는 토속적인 산골 공간이었다. 이 같은 공간을 무대로 그는 전통적으로 이행되어온 우리 민족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재구해 내고 있다. 이 같은 시세계의 추구는 30년대 시단의 주류였던 모더니즘시의 방법과 세계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독창적으로 개척해 나간 의의를 지닌다. 아울러 이 같은 전통적인 생활상에 대한 시적 형상화에 깔려 있는 그의 시적 인식은 우리 민족의 삶에 근원적으로 내재해 있는 공동체의식이며, 민족적 연대감이었다. 이것은 삶의 기반이 불안정한 상실된 세계 속에서 자기 존재의 근원을 탐구해 보려는 강인한 집착이었으며, 나아가 민족적 동일성을 추가하려는 의도적 접근이었다.
이상으로 식민지의 한 시인으로서, 민족문화와 민족역사의 근간이 유린당하는 그 절박한 상황 속에서, 그 상황에 함몰되지 않고 문화와 역사와 민족의 유구함을 내면적 의식 속에서라도 추구한 시인 백석은 바로 그 점만으로도 여타의 시인과 구별되어 문학사에 특별히 기록되어야 마땅하다.
또한 백석의 시를 정신사의 관점에서 그를 다루는 것이 올바른 평가에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다. 당대의 우리 민족 대다수의 정신 상황을 고향 상실감과 운명론적 세계관으로 규정한다면 이에 대한 가장 뚜렷하고 정직한 반응을 보인 문인의 하나가 백석이다. 또 이러한 문학적 반응이 그에 걸맞은 창작방법을 통해 구체화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특히 일제치하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몰락해 가는 고향을 고스란히 보존하여 지키려 한 점은 그의 시편들이 지니는 커다란 의의라 아니할 수 없다. 이렇듯 백석은 1930년대 중반에서 1940년대 초까지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인의 한사람으로 부각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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