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학당은 1907년 3월 북간도 한인사회에서 현지인이 세운 최초의 민족사립학교였다. 양정학당은 설립과정에서 중국 당국의 지원을 받았지만 이동춘과 한인사회의 지원에 힘입어 세워질 수...
양정학당은 1907년 3월 북간도 한인사회에서 현지인이 세운 최초의 민족사립학교였다. 양정학당은 설립과정에서 중국 당국의 지원을 받았지만 이동춘과 한인사회의 지원에 힘입어 세워질 수 있었다. 양정학당의 교육목표는 한인들이 현지 생활에 적응하는 능력과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양정학당은 민족학교와 다르게 중국어와 중문과목에 대한 교육과 중국사와 중국지리 등 중국 문화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여 중국 정부의 이민정책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양정학당은 학생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중국어 대신 한국어를 사용한다든지 체조과목에 대해 단순한 체력단련으로서 체조수업이 아닌 제식훈련과 같은 군사훈련으로 체조수업을 강조한 점에서 같은 시기 설립된 북간도지역 민족학교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처럼 양정학당이 처음부터 중국식 교육을 병행한 것은 당시 통역관의 자격으로 청 당국의 관리로 생활한 이동춘의 경험과, 북간도 한인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북간도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어린 학생들에게 그러한 능력을 배양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양정학당은 중국 당국의 이주한인에 대한 귀화정책과도 맞물리면서 한인의 현지 정착을 돕기 위한 목적도 담고 있었으므로, 설립 초기부터 중국 당국의 지원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간도침략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중국 당국은 북간도 한인에 대해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의 차단 및 이주 한인에 대한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북간도 이주한인에 대한 관립학교의 설치를 강화시켜 나갔다. 이 같은 교육정책에 따라 양정학당은 설립 이듬해인 1908년 3월 관립학교로 전환되어 중국식 교육체제로 편입되었다.
1908년 관립학교로 전환된 이후 양정학당은 중국식 교육체제와 동일한 교과과정을 채택하였고, 학교 명칭 역시 ‘관립 제2학당’·‘현립 제2학교’ 등 중국식 교육체제의 명칭으로 변경하는 등 중국 관립학교로서 변모되어 갔다. 때문에 양정학당 학생들은 중국식 학교로의 전환에 불만을 표출하면서, 1909년 4월에는 갑반 학생들을 중심으로 동맹휴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양정학당은 중국 당국의 정책에 의해 관립학교로 전환했지만 북간도 한인사회의 유지 및 발전을 위한 양정학당의 교육정신은 간민교육회와 길동기독학당 등으로 계승되어 나갔다. 양정학당의 설립자인 이동춘은 그 과정에서 중국 당국과 한인사회의 가교적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한인의 자치와 교육을 목표로 한 교육활동을 전개해 나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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