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노블 부인(Mrs. Mattie Wilcox Noble, 1872-1956)을 사례로 하여 ‘선교사 부인’의 ‘선교생활’을 연구하는데 목적이 있다. 아내, 어머니, 주부로서 가정의 일상생활을 관장하고, 그리고 ...
이 논문은 노블 부인(Mrs. Mattie Wilcox Noble, 1872-1956)을 사례로 하여 ‘선교사 부인’의 ‘선교생활’을 연구하는데 목적이 있다. 아내, 어머니, 주부로서 가정의 일상생활을 관장하고, 그리고 선교사업에도 종사해야 하는 선교사 부인에게 선교사업과 일상생활은 공과 사가 중첩된 분리하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선교사업과 일상생활을 접맥시켜 ‘선교생활’이라는 개념으로 선교사의 선교활동을 미시적으로 복원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기독교의 정체성을 규명하기 위해 선교사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했지만, 선교사 부인을 대상으로 하거나 선교사의 일상생활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선교사 사회의 1/3 가량을 차지한 선교사 부인은 정식으로 선교사로 임명받지 못하고 남편을 따라 선교현장에 파송되어 보조선교사 또는 자원봉사자로서 보수 없이 선교사업에 종사했다. 선교사 부인은 전적으로 소명의식에 따라 선교사업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선교사 부인의 다중적 역할과 선교사업의 소임을 성공적으로 감당한 대표적 인물로 노블 부인을 들 수 있다. 노블 부인은 누구보다 ‘선교사 의식’에 충만했으며 남편과는 동역(同役)을 수행하고, 전도부인을 양성하는 등 여성사업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노블 부인은 선교사 부인의 다중적 역할과 정체성을 확인하기에 충분한, 42년간에 걸친 한국생활을 The Journals of Mattie Wilcox Noble, 1892-1934 라는 기록물로 남겨놓았다. 이외에도 노블 부인은 많은 저작과 기고문을 남겼다. 신학적 사유의 산물이라기보다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과제를 다룬 내용들이었다. 노블 부인의 대표적인 저작으로 『아모권면』과 『승리의 생활』을 들 수 있다. 『아모권면』은 교회의 사경회와 어머니회에서 교재로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일반 잡지에도 연재되면서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널리 읽혔던 육아법에 관한 새로운 고전이었다. 『승리의 생활』은 초기 한국감리교회의 지도자들이 자신의 회심과 이후의 사역을 스스로 통찰함으로써 한국인 기독교인들의 주체적이고 개척적인 선교사업을 드러낸 의미있는 저작이다. 노블 부인이 양성한, 낮은 지식과 초라한 신분을 지닌 전도부인이 서울의 유력한 남성 기독교 지도자들과 같은 반열에 놓였다.
노블 부인은 1892년 5월 노블(William Arthur Noble, 1866-1945) 선교사와 결혼한 직후 고향 펜실베니아 윌크스배러(Wilkes-Barre)를 떠나 1892년 10월 한국에 도착했다. 1934년 한국을 떠날 때까지 노블 부부는 평양과 북쪽지방에서 마을교회를 개척하였고, 서울과 중부지방에서 관리 감독활동을 수행했다. 노블 부인은 남편이 담임한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여성과 어린이를 위한 교육사업을 전개하였고, 북쪽지방의 마을교회를 개척하는 일에 전도부인을 양성하여 파송했다. 한국감리교회 최초로 체계적인 여자사경회를 시작했으며, 어린이주일학교와 영아부를 독자적으로 조직했다. 남산현교회의 어린이주일학교는 당시 교파를 초월하여 주일학교의 모범으로 예시될 만큼 조직과 교육내용이 정비되어 있었다. 서울로 임지를 옮겨온 후에는 평양에서 개발한 방법론을 가지고 서울과 근교를 순회하면서 어린이주일학교와 영아부를 확장시켜 나갔다.
선교는 교회를 개척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이루어졌다. 한국에 사는 선교사들의 일상생활은 서양문명의 표준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가족을 단위로 안정된 가정생활을 추구하면서 그 기반 위에서 장기적인 선교사업에 집중할 수 있기를 원했다. 노블 가족이 살았던 서울과 평양의 선교기지는 선교사의 사택과 교육·의료기관 등이 집중되어 선교사업의 효율성을 높였으며, 한국인들에게 개방된 공간으로도 기능했다. 선교사들은 가정의 대소사와 자녀교육, 생필품의 구입 등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였고 미국의 국경일이나 교회 절기, 개인적인 기념일, 선교상 주요한 행사 등을 교파를 초월하여 함께 지키면서 정서적 유대와 지지를 공고히 하는 한편 애국심과 미국 시민의식을 강화하고 전승하고자 하였다. 여름 무더위에 북한산, 대동강 그리고 이후 원산해변 등지에서 이루어진 선교사 사회의 여름휴가 관행은 근대 바캉스문화의 원조가 되었다. 선교사의 부인들은 자신의 집을 개방하고 서구문명을 전시하면서 선교지를 기독교문명화하려고 노력했으며, 선교사 가정의 근대적 문명생활은 한국사회 근대화의 한 원형으로, 선교사의 가정생활은 한국 기독교가정의 모델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선교사들의 이와같은 선교생활은 한국인 관계망을 통하여 유지되고 확산될 수 있었다. 노블 부인은 한국인 고용인, 남녀 장학생들을 통해 가정사, 개인적인 업무 그리고 선교사업에 이르기까지 도움을 받으면서 선교 사역의 효율성을 꾀할 수 있었다. 노블 부인의 전도부인들은 부부동역, 여성지도력의 발휘, 순행전도의 모범을 보이며 교회를 개척하고 여성들을 계몽하였다. 선교사를 영적인 부모로, 스승으로 여겼던 초기 한국기독교 지도자들은 선교사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선교사들에게 배운 복음과 선교관을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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