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M. 전킨의 한국 선교 활동 연구 [韩语论文]

资料分类免费韩语论文 责任编辑:金一助教更新时间:2017-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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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구한말 호남지방에서 활동했던 선교윌리엄 맥클리어리 전킨(William McCleary Junkin)의 한국 선교 활동을 역사적으로 정밀하게 추적 재구성한 것이다. 1892년 11월 서울에 도착한 전킨...

본 논문은 구한말 호남지방에서 활동했던 선교사 윌리엄 맥클리어리 전킨(William McCleary Junkin)의 한국 선교 활동을 역사적으로 정밀하게 추적 재구성한 것이다. 1892년 11월 서울에 도착한 전킨은 그 후 1896년 4월 군산으로 완전히 이주할 때까지 서울에 체류하면서 한국어를 배우고 남장로교의 전반적인 호남 선교 준비 활동에 참여하였다. 전킨은 1893년 겨울 딕시를 떠나 도시 성벽 밖의 새로운 집으로 이사했다. 서울 서소문밖의 그 집을 오픈하여 한국인 전도에 나선다는 생각이었다. 전킨은 동학으로 인해 선교사들의 도성 밖 출입이 제한된 1894년 6월부터 서소문 사역을 시작하였다. 사실상 전킨의 단독 목회가 시작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서소문 자택 사랑방을 전면 개방하여 한국인들을 맞아들였다. 벌써 전킨의 한국어 구사 능력은 일상적인 대화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1895년 3월 전킨의 서소문 사역은 이제 단순한 전도의 거점을 넘어 서서 신앙공동체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 때 전킨 목사가 인도하는 첫 예배가 드려졌던 것이다. 또 전킨은 1895년 4월 2일 주일 자신의 서소문공동체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5명을 문답하였다. 이 5명 가운데 2명은 드루의 환자였고, 다른 1명은 드루의 하인으로 일하고 있던 남자 아이였다. 문답 결과 두 명이 합격하여 세례를 받았다. 이는 남장로교 선교사에 의해 베풀어진 최초의 세례식이었다. 그 후 전킨은 1895년 봄 군산을 다녀온 이후 전킨부인과 매티 테이트에 의해 관리되고 있던 자신의 서소문공동체의 구성원 7명을 문답하여 그 가운데 3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로써 전킨의 교회는 세례교인 5명의 회중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후 드루와 함께 군산으로 내려간 전킨은 1896년 7월 20일 군산 사람 송영도 김봉래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호남 최초의 세례였다. 군산교회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 후 군산교회는 성장 가도를 달렸다. 전킨은 1897년 7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1898년에는 14명에게, 1899년에는 상반기에 30명, 하반기에는 무려 56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리고 전킨이 안식년을 맞아 미국을 떠나기 직전인 1900년 4월에는 모두 53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때 군산선교부 경내에는 만자산, 남차문, 송지동, 통사동 등 모두 네 곳에 신앙공동체가 세워져 있었다.
안식년 후 전킨은 곧 선교현장에 복귀하였다. 1902년 군산 영역에서는 51명의 학습인이 스스로 문답에 참여하여 그 중 18명이 세례를 받아 교회의 정회원이 된 것을 비롯해 모두 77명이 세례를 받았고, 4명의 아이가 유아세례를 받았다. 그 후 1904년까지 전킨은 군산 영역의 공동체들을 계속 관리하고 목회후보생을 교육시키며 군산남학교의 관리자로서 학생들에게 영어성경과 구약성서역사 그리고 작문을 가르쳤다. 전킨부인은 1902년 군산남학교를 시작한데 이어 1903년 스트래퍼에 의해 시작된 군산여학교를 1904년 인수 받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남장로교 한국 선교부는 1904년 연례회의에서 군산 선교사 전킨을 전주로 전임시켰다. 그리고 그의 사역지를 전주 3마일 이내로 제한하였다. 그의 건강을 염려하여 내린 조치였다. 전킨의 사역은 모두 4개의 영역-전주사역, 지방사역, 전주남학교, 평양신학교-에서 진행되었다. 전킨이 담당하고 있던 전주교회 사역은 전킨 부임 이후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다. 전킨은 1906년 전주 서문밖에 780평의 대지 위에 57평 건평의 한양절충식 새로운 예배당 건축을 주도하여 교회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전킨의 지방사역지는 김제와 금구 등 두 개 군이었다. 또 전킨은 해리슨에 이어 전주남학교도 관리하였다. 전킨 부인 역시 전주여학교와 전주교회 주일학교를 맡아 사역하였다.
전킨은 1908년 1월 2일 전주에서 사망했다. 장티푸스가 폐렴으로 발전한 것이다. 천성적으로 몸이 약했던 데다가 열정적인 선교로 몸에 많은 무리를 주었던 때문이었다. 전킨의 시신은 군산으로 옮겨져 1월 4일 그의 2명의 아들 곁에 묻혔다. 전킨은 슬하에 모두 5명의 자녀를 남겼다. 전킨부인은 그 해 봄 미국으로 귀국하여 자녀들을 교육시킨 후 1952년 11월 1일 별세하였다.
윌리엄 전킨은 한국 사람을 가장 잘 이해한 선교사였다. 사실 그것은 한국어를 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 그는 한국인들과 함께 살았고 그들의 마음과 삶에 들어가 있었다. 거기서 그는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했고, 인간관계를 형성했다. 그는 한국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정말 흥미를 느꼈다. 그들의 단점과 장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 모든 것을 떠나 그들을 사랑할 줄 알았다. 그가 세운 교회는 지금도 왕성하게 믿지 않는 자들을 주님께 인도하고 있다. 그의 선교의 열매는 전라도지역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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