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널즈(W. D. Reynolds)가 한국장로교 선교상황의 발전과 변화에 끼친 영향 연구 [韩语论文]

资料分类免费韩语论文 责任编辑:金一助教更新时间:2017-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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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는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레널즈(William Davis Reynolds Jr. 李訥瑞)의 한국선교 활동을 살피고 그의 선교활동의 의의를 새롭게 조명하려는 데 있다. 레널즈는 1867년 미국 버지니아 주(...

연구는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레널즈(William Davis Reynolds Jr. 李訥瑞)의 한국선교 활동을 살피고 그의 선교활동의 의의를 새롭게 조명하려는 데 있다.

레널즈는 1867년 미국 버지니아 주(州)에서 출생하여 1892년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부의 파송으로 내한한 선교사이다. 그는 1937년 은퇴하기까지 한국선교를 위해 생을 불태웠으며, 1951년 미국에서 별세했다.
레널즈는 전통적인 장로교 가정에서 엄격하고 보수적인 신앙훈련을 받고 자라났다. 어려서부터 어학에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그의 이러한 재능은 한국 선교에서 성서번역이라는 특별한 사역을 감당하는데 매우 유익하게 활용되었다.
햄든 시드니(Hampden Sydney) 대학에서 문학사를 취득한 레널즈는 운동선수로도 활약할 만큼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학업성적도 매우 우수하여 전체 수석으로 졸업했다. 유니온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Virginia)를 졸업한 레널즈는 볼링(Pasty Bolling)과 결혼했다. 신학생이던 레널즈는 학생선교대회(Inter-Seminary Alliance for Foreign Missions)에 참석하여 언더우드와 윤치호의 연설에 감명을 받고 한국선교를 결심하게 되었다.

한국에 내한한 그는 뛰어난 어학실력을 활용하여 성서번역사업에 헌신 했으며, 언더우드와의 관계를 통해 한국의 장로교회 설립과 선교의 일치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레널즈는 호남지역 교회를 설립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친 훌륭한 전도자였다. 미 남장로교회의 파송으로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선교사공의회의 결정에 의해 남장로교 선교구역인 호남지역 선교를 1893년부터 본격화했다. 레널즈는 호남 전 지역을 답사하며 효과적인 전도의 방법들을 모색하였다. 그는 답사의 결과를 토대로 호남지역에 선교지부를 설치하였으며 전주에서 사역하였으나 성서번역과 평양장로회신학교의 강의를 위해 일 년에 몇 차례 씩 먼 여행을 해야 만 했다. 목포에서 사역하기도 했던 그는 호남지역 교회에서 첫 세례를 베풀었으며, 평양장로회신학교 전임교수로 평양으로 이주하기까지 그는 전주를 비롯하여 호남지역 선교를 위해 헌신하였다.

레널즈는 한국 장로교 설립의 공헌자이다. 내한 이듬해에 장로교 선교사공의회 의장으로 선교지 분할을 위한 예양협정(Comity Agreements)과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구체화하는 일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 두 가지 정책을 평생토록 실천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그는 공의회 활동을 통해 하나의 장로교회 설립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만일 그의 뜻대로 한국에 하나의 장로교가 세워졌다면, 한국의 장로교회는 토착화 된 민족교회로서 당시 일제의 침략 하에서는 물론이고 오늘날 사회 각층의 갈등과 교파분열의 부작용들을 상당부분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레널즈는 마지막 독노회장(獨老會長)으로 창립총회의 사회를 맡아 1912년 ‘조선 예수교장로회 총회’의 탄생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미국 남장로교회 한국 선교사들과 호남지역 교회를 대표했으면 적극적인 연합주의자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그가 탁월한 성서번역가라는 것이다. 1895년부터 성서번역에 참여한 레널즈는 1900년 첫 신약성서, 1906년 개정판 신약과 1910년의 구약번역에 이르기까지 번역작업을 계속하였다. 이후 1937년 개역성서가 완성되기까지 최고의 한글성서 번역가였던 레널즈는 힘든 성서 번역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한국에서 활동했던 거의 모든 시기에 성서번역에 참여했으며, 번역에 참여했던 31명의 외국인 번역자 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활동했다. (1895년-1938년)
미국성서공회 한국 지부 총무였던 밀러(H. Miller)는 그를 ‘최고의 한국어 실력의 소유자이며, 구약의 예레미아(Jeremiah)를 제외하면 모든 성서의 번역이 그의 작품’이란 말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성서번역 외에도 성경사전과 신학교재 등을 번역하였다.

레널즈는 장로회신학교의 기초를 닦은 전문 교육자였다. 평양에 장로회신학교가 처음 설립될 때부터 미 남장교회 대표로써 관련을 맺은 그는 5명의 정교수를 확정한 1916년에는 조직신학 교수로 참여하였다. 그는 은퇴하기까지 교수로 재직했으며, 학술지인 신학지남의 편집인을 1918년부터 1937년까지 계속 맡아서 초기 장로회신학교의 신학교육의 큰 부분을 담당했다. 그가 선교 초기에 발표한 신학교육 이념은 장로회신학교의 교육이념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그가 제시한 교육원칙이 비록 후대의 거센 비판에 직면하기도 하지만, 당시 신생 한국교회에 나름대로 가치 있는 설정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본 연구는 이처럼 한국 개신교 초기 선교에 지대한 업적을 남긴 훌륭한 선교사 레널즈의 진면목을 역사적 사실과 증거들을 통하여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의 뛰어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별로 주목받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음을 연구를 통하여 알 수 있었다. 레널즈의 한국선교활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사료 발굴 및 연구를 통해서 더 많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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