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선교사 헐버트(Homer B. Hulbert)의 활동 연구 [韩语论文]

资料分类免费韩语论文 责任编辑:金一助教更新时间:2017-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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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y suffered from Japanese imperialism as Protestantism started to be spread at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Many struggled to get back the country at that time and some Christian missionaries were part of them. They were sent to Korea to preach th...

They suffered from Japanese imperialism as Protestantism started to be spread at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Many struggled to get back the country at that time and some Christian missionaries were part of them. They were sent to Korea to preach the Word but most of them overlooked the Korean situation of the times due to the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 principle.
Hulbert, however, thought that church and state should not be separated and stuck to it. He considered Korean political issues that other colleagues had disregarded and was with the Korean when they faced a national crisis, the loss of Korean sovereignty.
On July 4th, 1886 Hulbert visited Korea with George W. Gilmour and D. A. Bunker through the Yukyongkongwon, a modern education institute. Hulbert published a world geography book, "Essentials A Political Geography" in a Korean edition, worked as an English teacher and established YMCA to modernize and enlighten Koreans.
He also participated in Christian publishing in order to enlighten people and give information about Korea abroad: He worked at Sam Moon publishing company and edited the English version of 'The Independent'.
In addition, Hulbert published a lot of works about Korea and made efforts to awaken Koreans with "The Korea Review", dealing with the Korean situation, geography, history, language, custom, archeology, etc. As a result of this, he contributed to promoting Korea. We find Hulbert's special interest in Korean history in "The History of Korea" and his view on the Korean situation after the Russo-Japanese War in "The Passing of Korea". His writings had been slightly increasing until 1898 and rapidly increased when the Russo-Japanese War took place in 1904. He wrote what Japan was doing in Korea, standing up to defy Japan and fought against Japan for their attempt to colonize Korea.
Hulbert insisted he was not be able to be a missionary, disregarding the situation of Joseon Dynasty at that time and took part in a national movement. When the Japanese brutally murdered the Empress of Korea, Hulbert protected the Korean Emperor Gojong, and moreover, when the annexation by Japan threatened Korean independence, he exposed Japanese true intentions to the United States and all over the world. Emperor Gojong put the greatest trust in Hulbert of all the foreigners in Korea so he was sent to Den Hagg in Holland as a special envoy. After he was forced to return to America by Japan, he continued publishing writings so that he let the world know the situation in Korea.
Hulbert returned to Korea in Aug, 1949 at the invitation of Seung-man Lee, the first Korean president and passed away on August 5th after one week of arrival in Korea. Homer Hulbert's tomb can be found in the foreigners' cemetery in Seoul. His wish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ister Abby." turned out to be truth after all. All of us know how much he loved Korea with this striking phrase and his contributions to Korea.
Now, Korean Christian churches should look around their neighborhood, embrace the society and consider how they can preach the Word to people just like Hulbert spread the gospel, encompassing the Korean situation in spite of the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 principle.

개신교가 전래되던 구한말의 한국은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에 직면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던 시기였다. 당시에 기독교를 전하기 ...

개신교가 전래되던 구한말의 한국은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에 직면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던 시기였다. 당시에 기독교를 전하기 위해 한국에 온 많은 선교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미국 선교부에서 정하는 정교분리 원칙으로 인해 한국의 시대적 상황을 간과한 채 복음을 전하였다.
그럼에도 한국의 상황속에 함께하며 정치와 복음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선교활동을 벌인 선교사가 헐버트이다. 동료 선교사들이 외면했던 정치적 문제, 주권상실이라는 민족적 위기에 처해있던 한국민족을 위해 시대적 어려움에 참여하여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였다.
헐버트는 1886년 7월 4일 길모어와 벙커와 함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을 통해 한국에 내한하여 한글판 세계지리서인 사민필지를 펴냈으며 뿐만 아니라 교사로 활동하고 YMCA를 창립하여 한국이 근대화되기 위해서는 교육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한국민의 계몽을 위해 애썼다.
헐버트는 기독교 출판에도 참여하였는데 무지한 백성들을 깨우치고 조선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 출판매체를 활용하였다. 삼문출판사에서 활동하며 기독교 문헌을 널리 보급하였으며 독립신문의 영문판 편집일을 맡기도 하였다.
또한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에 관한 많은 글들을 국내외에 발표하였는데 『The Korea Review』를 통하여 당시 한국의 사정과 지리, 역사, 언어, 풍속, 고고학등의 한국의 어려운 상황속에서 한국인의 경각심을 높이는데 노력하였으며 어려움속에 있는 한국을 외국에 알리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헐버트는 한국역사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시켜 『The History of Korea』 단행본을 펴냈으며 당시 러일전쟁이후의 한국현실에 관해 자세히 자신의 견해와 함께 서술한『The Passing of Korea』를 펴냈다. 헐버트의 저술활동은 1898년 가면서 조금씩 증가하다가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급증하여 대부분이 일본의 침략에 대한 부당성과 일본의 침략을 반대하는 내용을 다루며 한국의 상황을 주변국들에게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헐버트는 당시 조선의 상황이 민족적 문제들을 외면하고 선교할 수 없음을 주장하며 조선을 위해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선교사였다. 을미사변이후 불안속에 있던 고종을 지키며 춘생문 사건때도 함께했으며 결정적으로 을사조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맺어지자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을 미국과 세계에 알리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고종의 신임을 얻어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로 파견되어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기도 하였으며 일본의 강압에 의해 미국으로 강제로 돌아가게 되었을때도 한국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많은 글들을 발표하였다.
1949년 8월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한국에 내한하였으나 장거리의 여독으로 8월 5일 서울 위생병원에서 별세하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그는 평소에 말해오던 “웨스터 민스터 사원보다 오히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는 말대로 한국땅에 묻힌 것이다. 우리는 헐버트의 활동을 통해서 그리고 이 말을 통해서 헐버트가 얼마나 한국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헐버트가 정교분리 원칙속에서도 한국의 상황을 포용하며 민족의 상황에 함께 하며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지금의 한국교회도 주변을 돌아보며 사회를 포용하고 그 안에 들어가 진정으로 기독교 복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 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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