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식민지 조선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시인·평론가이자 프롤레타리아문학 단체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위원장이었던 임화(1908-53?)가 그 평생 동안 남긴 시, 평론, 문학사론, 영화론 등 다방면에 걸친 저작의 내용을 검토하고 거기서 보이는 '주체' 개념의 변천을 특히 식민지에서 민족이 놓인 상황과 그 역사적인 위상을 어떻게 해석하고 그것을 문학적 실천으로 이어갔는가의 관계에서 검토하는 것이다. Ⅰ에서는 1930년 전후 프롤레타리아문학 진영 내부에서 이루어진 예술대중화논쟁에 대해서 소련과 독일, 중국·대만, 일본의 그것과 비교하면서 조선의 논쟁의 특징을 지적했다. 이 논쟁에서 김기진은 수많은 평론을 통해 대중화의 다양한 방안을 제안했고 그 양과 질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높은 수준의 논의를 전개했는데, 도쿄의 무산자사에 있던 김두용과 임화가 몇 차례 그것을 비판함으로써 그대로 논의가 끝나게 되었다. 이러한 논쟁의 경위 자체에 이미 조선에서의 예술대중화논쟁의 특질이 보인다. 한편 이 논쟁에서 특징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임화의 이야기시, 이른바 '단편서사시'에 대한 평가가 초점화된 점일 것이다. 소련이나 독일의 노동자통신원 운동에서도 시의 창작방법이 논의된 적이 있었는데, 특정한 개인의 이야기시가 이렇게 초점화된 일은 없었다. 또한 일본의 논의를 살펴보자면, 대중화논쟁의 당사자인 나카노 시게하루(中野重治) 역시 시를 쓰고 있었으나, 그의 작품이 논쟁에서 크게 초점화된 일은 없었다. 거기에 비해 조선의 논쟁에서는 임화라는 특정한 개인의 이야기시에 초점에 맞추어진 것이 특징적이었다. Ⅱ에서는 Ⅰ에서 다룬 예술대중화논쟁 당시 언급된 임화의 산문시와 이야기시의 특징과 성격을 검토했다. 임화의 시 가운데 이야기시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군의 현저한 특징은 보통의 서정시처럼 단순한 자연풍경이 그 무대나 배경으로 선택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화자가 직면하고 있는 것이 도시의 거리거나 바다, 산 그 어느 것이라 할지라도 이 풍경은 식민성이 강조되어 있는 것이다. 임화의 시에서 바다=현해탄만큼 중요한 장소, 식민지 풍경으로서 중요한 것이 서울의 종로 네거리이다. 임화가 ‘반도팔경’의 하나로서 든 이 장소는 운동의 동지가 만나고 서로 격려하며 때로는 눈물을 흘리는 그러한 이야기를 구성하는 장소였는데, 임화는 이 종로 네거리를 시의 무대로 삼아서 연작이라고 할 수 있는 시를 생애에 걸쳐 남겼다. 그는 이 시들을 통해 혁명성과 식민성이 전경화된 현장을 강조하면서 그 대립과 모순의 양상을 폭로하고 제시했다. Ⅲ에서는 임화가 1930년대 중반부터 후반에 걸쳐서 발표한, 동시대 소설에 대한 리얼리즘 비평의 내용과 목적, 그리고 그 동력과 모티프에 대해서 논했다. 임화는 소설론에서도 분열·대립과 통합·지양이라는 시각으로 독자적인 리얼리즘 소설론을 전개했다. 그의 평론 「세태소설론」(1938.4)이 전형적인 것으로 동시대 소설의 경향으로서 내성적인 것과 세태적인 것이 동시에 출현하는 것의 의미를 묻고 그 원인이 말하려고 하는 것과 묘사하려고 하는 것의 분열에 있다고 했다. 그러한 시각은 당시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가였던 G. 루카치의 '전체성'(Totalitat / totality)의 이론과 상동성이 있다. 루카치의 경우는 부르주아 문화의 이율배반을 해결하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트와 전위가 바라볼 수 있는 '전체성'의 관점을 확보한 것이었다. 임화의 경우는 그것을 전향소설의 주인공에게 적용하여 성격상의 결여, 다시 말해 인물보다 묘사에 중점을 두고 있는 점, 등장인물이 행위하는 성격이 아니라 생활하는 시정인이 되고 있는 점을 「현대소설의 주인공」(1939.9) 등에서 지적하고 세태소설론 때와 마찬가지로 분열의 극복과 어떤 전체성에 대한 지향을 주장했다. 한편 1931년 만주에서 일어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의 충돌사건인 ‘만보산 사건’을 소재로 한 이태준의 단편소설 「농군」(1939.7)에 대해서는 애수와 비애의 감정이 비장하고 비극의 장대함을 방불케 한다는 점에서 한 민족의 수난의 운명, 큰 비극 속에 감춰진 서사시의 감정이 그려졌다고 절찬했다. 임화의 리얼리즘론은 여기서 민족의 비애와 상실감의 표출을 통해 '주체'를 확보함으로써 스스로 제국의 논리를 내면화했다. Ⅳ에서는 임화가 조선의 신문학사를 집필하는 사이에 발표한 평론 「신문학사의 방법」(1940.1)과 거기서 논의된 문화의 이식성,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해방 이후 한국에서의 비판까지를 검토하며 문학사에서 '조선적인 것'을 어디에서 찾아낼 수 있는가에 대한 임화의 견해를 정리했다. 「신문학사의 방법」(1940.1)은 그가 쓴 「개설 신문학사」(1939-41)의 방법론을 논한 것인데, 조선의 신문학의 역사가 일본을 통한 서구문학의 이식의 역사였다고 한 점이 당시가 아니라 후년에 한국의 문학연구에서 문제가 되었다. 이 '이식문학론'은 그러나 임화의 문학사론에서 폭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방법론이며 시각이었다. 그것이 적용되고 있는 하나의 사례로서 조선 문학사에 한문학의 역사를 편입한다는, 민족이나 언어에 대한 독자적인 사고방식이 있었다. Ⅴ에서는 임화가 1930년대의 중반 「신문학사」 서술을 시작하기 이전 「조선신문학사론서설」(1935.10)을 쓴 전후에 발표한 몇 가지 언어관계의 논문에 대해서 논했다. 이 시기의 그의 언어론은 자신의 문학사 서술의 전제일 뿐만 아니라 당시 식민지 조선의 상황에 호응하는 견해였다. 임화는 당시 소비에트연방의 언어론과 언어정책을 적극적으로 참조하면서 민족어로서의 조선어가 어떤 환경에 놓였는지를 강조했다. 동시에 조선어의 역사에 대해서 되돌아보고 유럽에서의 속어의 등장과 조선의 개화기 이후의 국문의 복권을 함께 생각하면서 민족어=조선어의 내용과 생성과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검토했다. Ⅵ에서는 최초의 근대문학사 서술이라고 할 수 있는 임화의 「개설 신문학사」의 구성원리를 살펴보며, 거기서 조선어나 조선인이라는 주체를 어떻게 설정되고 있는가를 검토했다. 임화는 조선문학의 고전에 대한 평가에서 사적변증법적인 시각에서 반-복고, 평민문학에 대한 언급을 강조하고 분열·대립과 그 지양으로 민족문학이 생성되는 것을 보여주면서 이광수의 문학작품에 있는 어떤 모순과 이데올로기성을 극복하기 위한 것으로 백조파와 신경향파의 문학의 의의를 인정했다. 그리고 이 「신문학사」 서술의 작업을 통해서 조선왕조 시대 국문으로 창작된 시조, 가사, 창곡, 소설 등을 민족의 고전으로서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즉 그는 중세의 한문/국문이라는 이중 언어생활, 두 가지 ‘글’을 가진 상태를 '정'과 '반'의 대립되고 모순된 상태로 파악하고 근대 이후의 신문학이 그 상태를 지양하는 '합'의 상태임을 제시하려고 했다. Ⅶ에서는 임화가 「신문학사의 방법」(1940.1)에서 언급한 H. 테느의 논의가 일본의 같은 식민지였던 대만에서 대만문학을 설명하는 개념으로서 언급되는 사례를 검토하고 그것을 통해서 임화가 「신문학사의 방법」에서 지적한 문학생성의 장소로서의 '환경'이 어떠한 것인지를 생각했다. 테느의 '환경' 개념은 유럽에서의 내셔널리즘에 대한 다양한 반성적 여론 속에서 비교문학이라는 지식의 제도를 통해서 극복되었는데, 제국 일본의 아카데미즘이 식민지문학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을 때 그 저항의 수단으로서 식민지 지식인에 의해 다시 언급된 것이었다. 대북제대 교수인 시마다 긴지(島田謹二)와 그 제자인 대만인 비평가 황더시(黃得時)의 각축이 바로 그러한 논쟁을 보여주고 있다. 황더시처럼 임화 또한 테느의 방법론을 인용하고 때로는 스스로 그 설명을 치밀화하면서 조선의 신문학을 말하고 동아시아 문학사에서의 ‘조선’을 주체화했다. 이러한 점에서 제국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과 대만에서 H. 테느의 문학사방법론이나 문화이론이 같은 1940년 전후에 언급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Ⅷ은 임화의 영화론에 대해서 논의한다. 그의 영화론은 리얼리즘 소설론이나 「신문학사」 집필에서의 검토와 마찬가지로 주체로서의 '민족'을 항상 고려한 것이었다. 임화는 식민지 조선의 영화에 대한 독자적인 논의에서 그 역사의 변천을 설명하고작품의 주제에서 민족의 주체를 확보하려고 했다. 임화에 따르면 조선의 영화는 ‘모방’이나 '이식'의 대상을 찾을 수 없었다. 즉, 영화라는 장르만은 ‘이식’의 사정이 달랐는데, 영화는 상업과 연극의 융성을 전제로 하여 근대에 처음으로 성립한 장르였다. 임화는 여기서 초창기 조선영화에서는 문학이 중요한 ‘원조자’ 역할을 했다고 지적한다. 영화 복지만리(福地萬里, 1941)에 대한 그의 평가는 부정적이었는데, 그 기준에서 예전에 이태준의 단편 「농군」(1939.7)을 평가했을 때와 같은 태도를 보여줬다. 대륙을 유랑하는 조선인 노동자의 방황을 그린 이 영화는 내용으로서는 대일본제국과 만주국의 당시 국책=오족협화의 ‘이상’을 구현한 것으로, 임화는 이 작품의 한계에 대해 지적하면서 그 판단의 기준으로서 작품의 서사시적인 도달성에 대해서 언급했다. 즉 조선민족의 민족이동을 서사시적인 화폭으로 파악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전의 예술대중화논쟁 당시 임화가 자신의 이야기시의 무대로서 선택한 것은 서울의 종로나 현해탄이라는 혁명성과 식민성이 전경화된 장소였다. 그러나 식민지 말기 임화는 일본, 조선, 만주라는 무대를 유랑하고 방랑하는 조선인을 통해 어떤 한 개인의 운명이 아니라 하나의 '집단', 하나의 공동체의 운명을 보려고 했다. 이것은 임화가 민족이라는 주체를 파악하려고 한 끝에 도달한 하나의 아이러니였다. 임화는 식민지 조선에서 프롤레타리아 시, 리얼리즘 평론, 문학사론, 영화론 등 다방면에 걸쳐 수많은 저작을 남겼다. 거기에 보이는 '주체' 정립의 방법은 다양한 수준에서 관찰되고 또 그것은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 전환한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현실을 모순 관계로서 파악하고 그것이 대립, 지양되는 것을 통해서 역사가 진행됨을 전제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주체란 혁명적 전위로서 때로는 관찰하고 때로는 그 동력의 주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주체’는 여러 모순을 잉태하는 민족의 주체로서 정립되었을 때, 동시에 제국의 논리를 내면화하게 되었다. ,韩语论文题目,韩语论文题目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