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벼루(硯) 연구 고대사회에서 ‘문자’는 강력한 통치의 수단이자 시간적․공간적 경계를 넘어 문화의 보급과 연결되는 매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문자자료의 연구는 고대... 삼국시대 벼루(硯) 연구 고대사회에서 ‘문자’는 강력한 통치의 수단이자 시간적․공간적 경계를 넘어 문화의 보급과 연결되는 매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문자자료의 연구는 고대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적 양상을 파악하는 데에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문자자료 중 하나로 꼽히는 벼루는 비교적 형태의 변형이 적고 장시간에 걸쳐 잔존하고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으나 연구대상으로서는 활발하게 사용되지 못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고대사회의 문자자료와 관련된 유물 중 하나인 벼루(硯)를 연구대상으로 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에서 확인된 자료를 정리하고 종합화하는데 목적이 있으며, 나아가 벼루의 형태적 특징을 기준으로 형식을 설정하여 각 형식 간에 나타나는 차이의 의미와 변화양상에 대하여 고찰해 보았다. 삼국시대의 벼루는 대부분 흙으로 구워 만든 토연(土硯)이며, 중국의 六朝時代 이후 등장하였던 원형의 벼루가 중심이 된다. 물론 삼국시대에는 石製, 陶製 벼루도 일부 확인되며 형태적으로는 방형 벼루가 원형 벼루에 비해 낮은 수치이지만 각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잔존하고 있다. 다만, 이들은 ‘벼루(硯)’라는 기종이 확립되기 이전 혹은 토제 원형벼루에서 석제 방형벼루로 변화하는 과도기적인 단계에서 나타나는 형태로 보여지며, 삼국시대 벼루의 주류에는 해당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삼국시대 벼루는 ‘벼루(硯)’라는 기종이 중국으로부터 유입되기 시작한 이후인 5세기 중․후반부터 다양한 시도를 거친 후 6세기 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제작 및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벼루의 도입은 이른 시기부터 중국과의 교류가 이루어진 고구려와 백제에서 먼저 이루어졌으며, 이후 중국 남조(南朝)와의 교류가 진행되었던 백제에서 특히 적극적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백제에서는 6세기 이후 점차 정형화된 원형 벼루가 나타나고 7세기 후반경 백제의 멸망과 함께 쇠퇴하는 양상을 보인다. 신라에서는 6세기 중․후반 이후에 백제와 중국 북조(北朝)의 영향으로 원형 벼루가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백제보다 늦은 시기인 8세기 대까지 활발하게 사용되다가 점차 방형의 석제 벼루로 변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삼국시대 벼루는 고구려, 백제, 신라 영역의 도성을 중심으로 한 중앙에서 가장 많이 확인되며, 왕궁으로 비정되었거나 위계가 높은 관청 시설로 여겨지는 생활유적, 도성 중심에 위치한 사찰 및 생산유적에서 확인되고 있다. 각 지방에서는 관청시설과 같이 위계가 높은 것으로 여겨지는 생활유적과 더불어 관방유적에서 확인되고 있는데, 이러한 분포는 벼루의 사용층이 중앙 관료와 같은 권력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었음을 의미하며 실생활용기로서 활발하게 사용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도입 당시에는 위세품적인 성격을 지닌 특수 기종으로서 중앙의 왕궁이나 사찰, 도성 등 위계가 높은 시설로 곧바로 유입된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위세품과 달리 실생활용기로 사용되면서 지역색이 반영한 정형화가 이루어진 이후에는 각 지방으로 골고루 퍼져나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어】 벼루, 연(硯), 도연(陶硯), 토기, 문자, 삼국시대, 장방형연, 이배형연, 제형연, 원형무각연, 원형대각연, 원형다족연 ,免费韩语论文,韩语论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