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최순우의 저술을 통해 한국미술 인식을 분석한 연구이다. 제4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한 최순우는 박물관에서 평생을 보내며 다양한 전시기획과 저술활동으로 한국미술의 아... 이 논문은 최순우의 저술을 통해 한국미술 인식을 분석한 연구이다. 제4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한 최순우는 박물관에서 평생을 보내며 다양한 전시기획과 저술활동으로 한국미술의 아름다움을 알렸다. 특히 ‘한국미술5천년’ 전시는 세계에 한국미술을 알려 국가적 위상을 높인 것으로 평가되었다. 또한 최순우는 독특한 문체로 한국미술을 묘사하여 한국미를 보급했다. 그동안 최순우에 대한 연구는 한국미술의 우수함을 알린 업적에만 집중되었다. 최순우가 해설한 한국미술은 민족의 우수함과 정체성을 보장했고, 한국인이라면 마땅히 숙지해야 할 전통과 자긍심으로 평가되었다. 만약 최순우의 ‘한국미’가 절대적인 것이라면 21세기 한국인의 삶과 예술에서 항상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최순우의 한국미는 전통 문화 콘텐츠로 기능하고 있다. 따라서 최순우의 ‘한국미’는 한국인의 불변하는 정체성이나 보편적 가치가 아니라 한국의 특수한 시대와 상황에서 만들어진 담론이라는 해석이 자연스럽다. 이 연구는 최순우의 한국미 모색이 1960-1970년대 한국 사회의 근대화 과정과 특수성에 기반하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 최순우의 한국미 인식에는 두 가지 배경이 작용했다. 첫째는 한국의 국제사회 편입에 자극받은 정체성 모색이다. 최순우는 국내로 수입된 서양 문물을 경계함과 동시에 해외의 서양인들에게 한국의 존재를 알리려 노력했다. 특히 서구인들에게 한국미술이 중국, 일본과 다른 가치를 지녔음을 설명하는데 주력했다. 국립박물관의 해외 전시에서 서구인들의 찬사를 받은 한국미술은 자긍심으로 인식되었다. 이것은 세계 속에서 동양으로의 편입을 의미했으며, 최순우의 한국미술사 연구의 방법론으로 자리 잡았다. 둘째로 최순우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이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미술 애정은 최순우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최순우는 일본인들의 한국미술 애호를 한국미술의 우수성으로 확신했다. 서구인과 일본인이 긍정적으로 평가한 한국미술 인식은 최순우에게 한국미 모색을 독려하고, 방법론으로 작용했다. 최순우는 1963년 처음으로 ‘한국미’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동시에 1963년부터 도자기 전시 기획과 저술 활동이 급증했다. 1967년부터 민예 전시 기획과 민예품 해설에 집중했으며, 1970년대 민예 동인을 이끌기도 했다. 1969년부터 한국미술의 외적 특성을 민족의 정신으로 동일시했으며, 1973년 ‘한국미술2천년’ 전시를 진행한 이후 민족미술을 정립했다. 이후 ‘한국미술5천년’ 전시를 일본과 미국에서 진행한 최순우는 한국 미술의 가치를 세계에 널리 알렸다. 1978년 출판된 『한국미술5천년』은 최순우의 한국미술 연구 성과와 민족미술의 자긍심을 정리한 저서였다. 최순우는 다양한 한국미술을 해설했지만, 모든 작품을 한국적이라고 인정하지는 않았다. 가장 한국적인 작품은 조선 도자기였으며, 백자의 흰색을 가장 한국적이라고 확신했다. 그 외 소박함을 보여주는 목가구와 담색조 회화 작품, 풍속화와 진경산수를 선정했다. 색채가 화려한 여성들의 장신구, 공예품과 서민적인 옹기, 그리고 왕궁이나 초가집은 한국미의 예외로 평가되었다. 최순우의 한국미는 한국미술 전체가 아니라 위계가 있는 특정 영역이며, 자의적으로 선택된 측면이 있다. 최순우는 당대 한국 사회를 문화의 혼돈으로 인식했다. 근대화에 따른 신문물 유입과 도시화를 우려하여 문화재 보존을 강조했다. 1950년대 후반 젊은 작가들의 추상회화 붐을 경계하고 전통적 개성을 지닌 김환기(金煥基)를 높이 평가했다. 뿐만 아니라 대중문화를 비판하고 참다운 한국인을 길러야 한다는 계몽적 목적도 확인되었다. 최순우는 신윤복(申潤福)의 풍속화를 자주 해설했다. 최순우는 여성들의 신문물 유행을 사대주의로 판단하고 전통 미술을 통해 계몽하려 했다. 착한 어머니와 아내를 ‘한국의 여인’으로 이상화한 시각도 확인된다. 최순우의 한국미는 한국사회가 세계성에 편입되면서 만들어진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 사회에는 동아시아 민족임을 증명해야 했고, 한국 사회 내부로는 외래문물 유입으로 전통문화를 요청한 것이다. 최순우의 한국미는 자의적으로 선택되었으며, 그 선택은 야나기 무네요시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미는 정신적, 윤리적 가치로 강요되었다. 그런 지점에서 문화의 다양성과 현실을 소외시켰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따라서 최순우의 한국미는 한국 사회의 근대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전통이며, 특수한 시대적 산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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