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스토리우스교는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하느님의 어머니’의 호칭 사용을 거부하여 이단으로 단죄를 받고 이집트로 유배되어 사망한 네스토리우스의 지지자들이 시리아 동부의 그리스도교 거점이었던 에데사로 이주하여 그곳에 신학교를 세우고 활동한 것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보편 교회와 단성론자들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았고, 489년 비잔틴 황제 제논의 칙령에 의해 에데사의 네스토리우스교 신학교가 폐쇄되고 신자들을 모두 제국 국경 밖으로 추방하는 명령이 내려짐에 따라 그들은 비잔틴 제국과 적대 관계에 있던 사산조 페르시아로 이주하게 되었다. 사산조 페르시아로 이주한 그들은 니시비스에 자리를 잡고 498년 교회회의를 통해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독립된 교회를 세우고,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사산조와 후일의 이슬람 제국은 비잔틴 제국과 적대 관계에 있는 이들을 정치적 역학 관계의 변화와 종교 간 관계의 변화에 따라 보호와 박해를 반복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네스토리우스교로 하여금 자연스레 대외 선교와 더불어 학교와 수도원이 결합된 독특한 제도를 통해 생존과 영향력 확대를 추구하도록 이끌었다. 중앙아시아로 진출한 네스토리우스교는 유목민 세계에 선교와 함께 문자 보급 등 문화 전달자의 역할도 수행했다. 중앙아시아 곳곳에 교회 공동체를 세우며 동쪽으로 전진한 네스토리우스교는 마침내 중국에 이르러 635년 선교사 아라본(阿羅本, 알로펜(Allopen) 일행이 당 태종을 만나 선교 허가를 받고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중국에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경교는 황실의 우호적인 대우를 받으며 잠깐의 박해시기를 제외하고는 중국에 온 첫 그리스도교로서의 활동을 펼쳐나갔으며, 781년에 경교 비석을 세웠다. 그러나 845년에 일어난 외래 종교 대박해를 맞아 경교는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의 큰 타격을 입고 중국 내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경교가 박해를 받게 된 것은 당 말기의 국수주의적 풍조와 더불어 종교 본연의 의미를 상실한 불교에 대한 박해의 여파에 휩쓸린 탓이라 할 수 있다. 박해를 겪은 경교는 중국 국경 밖으로 이동하여 이전부터 활동해 오던 유목민 세계로 들어가 그 영향력을 지속해나갔다. 돌궐족에서부터 시작하여 위구르족, 거란족, 여진족을 거쳐 12세기부터 등장한 몽골족에 이르기까지 경교는 북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 세계에서 그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갔다. 13세기 몽골 제국의 정복전에 유라시아 대륙이 정치적으로 통일되고, 활발한 동서 교통이 이뤄지는 가운데 경교는 동아시아와 서아시아에서 다시 한 번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서아시아에서는 네스토리우스 교도가 분열 후 서방 교회를 방문하기도 했고, 중국에서는 각지에 교회 공동체를 세우고, 제국 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4세기에 접어들어 네스토리우스교는 서아시아에서는 일칸국의 쇠퇴와 티무르의 등장, 흑사병의 창궐로 치명타를 입고 소멸의 길을 걸었으며, 동아시아에서는 지나친 한화(漢化)로 인한 정체성 상실, 원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반란과 명(明) 제국의 등장으로 한족 민족주의가 득세하면서 치명타를 입고 중국 내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경교가 소멸하게 된 원인은 대체로 지나친 황실 의존, 중국에서의 유교의 영향력을 간과한 점, 중국의 주류 종교들의 개념과 용어의 지나친 차용으로 인한 정체성 왜곡, 모교회로부터의 한정된 지원, 현지인 성직자 양성 실패, 체계적 문서 선교의 미흡함 등을 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교가 교회사에 미친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는데, 우선, 동아시아에 최초로 그리스도교를 소개했으며, 종교를 통한 동서문명 교류의 첫 번째 장을 열었다는 점, 그리고 서구 교회 중심의 사관(史觀)에 갇혀 올바르게 평가받지 못하던 동방 그리스도교의 역할과 위치에 대한 올바른 평가의 필요성을 일깨웠다는 점이 그것이다. 경교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역사가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살피는 것이 아닌, 과거의 일에 오늘을 비추어 보다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거울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과 한 사람의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자신의 믿음을 어떻게 다른 문화와 종교, 풍습을 가진 이들에게 효과적으로 알리고 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과 이를 위한 대화의 필요성을 잊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韩语论文网站,韩语论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