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근대의 회화를 지배해 온 시각중심주의(ocularcentrism)를 비판하고 촉각의 가능성에 주목함으로써 촉각이 시각을 재활성화할 수 있는 회화적 방법론을 탐구하는 한편, 여기서 제기되...
본 연구는 근대의 회화를 지배해 온 시각중심주의(ocularcentrism)를 비판하고 촉각의 가능성에 주목함으로써 촉각이 시각을 재활성화할 수 있는 회화적 방법론을 탐구하는 한편, 여기서 제기되는 주체의 가변성을 고찰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촉각적 시각성(haptic visuality)’은 전자의 문제를 고찰하는 키워드라 할 것이며, 회화에서 촉각적 시각을 형상화하기 위해 시각과 촉각이라는 두 감각의 융합적 표현방법을 모색하는 일은 본고의 절차가 된다. 이들의 키워드와 절차를 빌려 연구자의 작품에 이를 적용하고 그 가능성을 검증하려는 데서 본고는 시작한다. 그 결과 감각의 융합적 표현이 회화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이 시도가 통상 인식되어온 회화에 있어서 주체의 위상에 어떠한 영향을 주게 될 것인 지를 밝히고 있다.
시각은 역사적으로 서구 문화에서 객관적 실재에 접근 가능한 최고의 감관지각으로서 인식되어 왔고 근대기를 통해 지금까지 줄곧 그 지위가 특권화되어왔다. 이러한 시각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은 데카르트에 이르러 시각을 탈신체화함으로써, 신체와 정신,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초래했고, 이원론적 세계관을 강화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시각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의 움직임이 시작되면서 촉각을 그 대안감각으로 주목하여 신체를 통한 통합적 인식을 강조하는 양상으로 발전되었다.
철학적으로는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가 촉각을 신체 주체 기반으로 용인함으로써‘살(la chair)’과‘키아즘(le chiasme)’을 중심으로 융합 감각의 존재론을 시도하여, 주체와 대상과의 새로운 관계성을 제시한 바 있다. 한편, 이리가레(Luce Irigaray)는 촉각을 기존 철학이 배제해 온‘모성적-여성적인 것(maternal-feminine)’과 연관시키고‘감각적 초월(the sensible transcendental)’로서 기존의 이분법을 가로지를 수 있는 매개적 감각으로 강조하였다.
회화에 있어서는, 회화의 외적 장르인 수공예 재료와 기법을 도입하여 체화된 경험과 물질성을 강조하여 촉각을 강화함으로써 장르 간 위계를 무너뜨리거나, 신체를 직접 도구나 재료로 활용하거나 재현하여 촉각을 강조함으로써 감각의 위계에 도전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연구자는 시각에 대한 이상과 같은 비판적 고찰과 촉각에 함의된 철학적, 미술사적 현상을 재검토함으로써, 회화에서 촉각과 시각의 융합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이에‘촉각적 시각성’을 주목하였다. 촉각적 시각은 보는 주체가 시각장을 관장하면서 대상을 분별하는 광학적 시각과는 달리, 응시를 거듭하여 점차적으로 본질을 파악해 나가는 종합감각이다. 이는 응시를 발하는 과정에서 응시의 표면과 결부되어, 지속적으로 초점을 변경하며, 결부된 표면이 피부와 몸을 연관시켜 에로틱하고 공포스러운 감정을 유발케 하는 특징이 있다. 이에 의해 타자와의 관계를 지향하는 상호주체적인 감각이 가능하다는 데서 촉각을 통해 재활성화 된 새로운 시각성이 갖는 의미가 있다.
이러한 촉각적 시각을 발할 수 있는 회화적 방법으로‘살(flesh)로서의 표면’과‘신체의 변형(transformation)’을 본고의 검증하고자 하는 문제로 제시하였다. 이를 위해, 연구작과 유비적 관점에서 논의할 수 있는 표본작가를 선정하여 이들이 시도한 촉각적 시각의 회화적 표현의 탐색여정을 고찰하고, 이들과의 유비관계 아래 연구자의 작품을 고찰하고자 하였다. 이 절차를 빌려 본고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살로서의 표면’과‘신체의 변형’을 고찰할 수 있는 야요이 쿠사마(Yayoi Kusama)와 엘렌 갤러거(Ellen Gallagher)를 표본작가로 선정하였다. 그리고 주체와 타자의 공존을 강조하는 에팅어(Bracha Lichtenberg Ettinger)의 매트릭스적 응시(the Matrixial Gaze) 이론을 주요 해석의 도구로 이들을 촉각적 시각과 연관시켜 분석하였다. 두 작가가‘망(net/web)’에 의한 매트릭스 공간을 창출함으로써 주체성과 타자성의 만남을 논의할 수 있었다. 또한 쿠사마는 표면을 자기 소멸과 자기 현전을 확인하는 장으로, 갤러거는 표면을 변형을 이루어 나가는 장으로 활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표현방식들이 촉각적 시각을 형성하는 회화적 표현의 가능성으로 제시될 수 있으며, 상호주체적인 문제와 연관 지어 논의될 수 있음을 부각시켰다.
다른 한편, 연구자의 작품에서 촉각적 시각과 연관된 표현방법과 회화적 어법의 논의를 위해, 연구작의 형식적 특성을 여러 국면적 요소로 나누어 논의하고, 국면적 요소의 강조점에 따라 유형별로 분류하여 분석하였다. 국면적 요소의 분석에 있어서는, 피부나 몸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상처 입은 이질적 기표를 표면에 드러내는 촉각적 정보를 고찰하고, 이것들이 드러내는 시각적 요소의 대비와 융합, 다층적‘살-표면’의 틈새들의 진동, 그리고 감각과 의미의 상호 전위⋅교차⋅침투를 통한 언캐니와 환상성의 발현으로 나누어, 이것들이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촉각적 시각을 끌어들이는 과정을 다룸으로써 연구작의 정황을 고찰하였다. 이들의 유형별 분석에서는 병치와 전위, 신체의 변형, 표면으로의 확대와 같은 시각어법들에 주목하였다.
마지막으로, 표본작가와의 비교적 고찰을 통해 연구작의‘살-표면’과‘신체의 변형’이 형상의 유동성을 드러내고 동적인 시각적 진동을 유발함으로써, 감각의 흐름, 리듬을 강조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본고는 연구작에 있어서 촉각적 형상의 변형,‘살-표면’의 강조, 시각적 환유의 전치, 표면으로의 확대 등의 표현형식을 통해 촉각적 시각을 끌어들여 감각의 융합을 이루어내는 방법들에 주목함으로써, 시각중심주의로 인해 가려졌던 비가시적이고 규정할 수 없는 것들을 회화적으로 드러낼 수 있음을 논증하고자 하였다. 또한 이러한 융합 감각의 표현은 촉각적 시각의 표현주체와 작품, 그리고 작품과 보는 주체가 상호주체적으로 교류하는 바탕이 되며, 주체의 체현과 신체적 변용을 추동함으로써, 주체의 경계가 지속적으로 변동되고 생성될 수 있다는 것을 결론으로 강조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