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의 목적은 1988년 한국 북방외교 및 서울올림픽과 1990년 북경 아시아 경기대회 그리고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등 국제적 배경하에서 한국이 중국과의 국교수립을 원하는 이유를 ... 본 연구의 목적은 1988년 한국 북방외교 및 서울올림픽과 1990년 북경 아시아 경기대회 그리고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등 국제적 배경하에서 한국이 중국과의 국교수립을 원하는 이유를 분석한 기존 연구와 달리 중국이 한국과의 수교를 결정한 이유는 무엇인지, 특히 1992년 한중 수교에 덩샤오핑(鄧小平)의‘남순강화(南巡講話)’의 영향이 무엇인지를 밝히려는 데 있다. 한국의 대(对) 중국 외교정책을 살펴보면, 노태우대통령은 80년대 말에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에서 남북간의 민족공동체를 발전시켜 나갈 것 등 6개 원칙을 선언하면서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해나가고자하는 의사를 천명하였다. 여기에 구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냉전의 종식으로 동아시아 전략구도에도 변동이 생기면서 한국의 북방정책은 더욱 가속화 되었다. 이와 더불어 한국에 대한 중국의 외교전략도 변하기 시작하였다. 덩샤오핑은 1990년대에 다시 정식으로 개혁·개방정책을 펼치면서, 90년대 형성되고 있던 안보 및 경제 환경에서의 유리한 조건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국가 경제발전을 가속화하여야만 된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중국은 독립자주(独立自主), 반패권주의(反霸权主义) 및 전방위외교 (全方位外交)를 중심으로 자국의 대외정책이 조정될 것임을 밝히면서 선린관계(善邻)를 유지하고 발전시킬 뿐 아니라, 한국 등 미수교국과의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고, 인접국가와의 국경문제에 있어 원만한 해결 등을 우선적으로 추진해왔다. 덩샤오핑은 중국의 사회주의를 일컬어 대내적으로는 "사회생산을 부단히 발전시키는 사회주의”, 대외적으로 "국가 간의 평화를 주장하는 사회주의”라고 표현하였다. 이러한 기본노선으로서 독립자주평화 외교정책을 강조했다. 1990년 중국의 대외개방은 연해 경제특구를 시작으로 선전(深圳), 주하이(珠海) 등 4개 경제특구를 설립하여 해외자금, 기술, 관리경험을 도입으로써 국유기업 구조를 바꿔가면서 사회주의 경제를 발전시키려는 새로운 시도는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덩샤오핑의 "남순강화”는 1992년 1월 18일부터 우창(武昌),선전(深圳), 주하이(珠海), 상하이(上海) 등을 시찰하고 발표한 담화를 말한다. 1989년의 천안문 사태 이후 목소리가 커진 보수 세력을 견제하고, 반대세력에 의해 경제활성화를 다시 추진하고자 1992년 1월 당시 중국 남부를 시찰하면서 개혁·개방을 가속화해야 한다고 연설하였다. "개혁·개방”이란 중화인민공화국의 덩샤오핑의 지도 체제아래에서 1978년 12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회 전체회의에서 제안되었다. 그 이후에 중국 국내 체제의 개혁 및 대외 개방정책을 말하는 것이다. "대외개방을 다시 시행한 중국이 외부세계에 가져다주는 내실적이고 잠재적인 영향을 세계적 척도로 평가해야 한다”는 논평도 있다. 1992년에 덩샤오핑의 남순강화를 통해서 "대내적으로 개혁, 대외적으로 개방”, 국내외 각각의 이익을 맺은 내재적인 차원은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재분배, 무역제도의 개혁, 투자 상황 등의 구조 변화를 포함하는데 주강삼각주에 위치하는 광동성 선전 경제특구의 선정을 설명하다. 외재적으로 아시아의 네 마리 용(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은 학습모델으로서 한국의 경제뿐만 아니라 정신문명의 건설을 강화함으로써 대외경제교류의 지속적인 증가는 한국과 평화를 유지하는 사회주의 정신문명의 건설에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따라서 덩샤오핑의 "남순강화”정책선택은 국유기업 구조와 무역제도 변화, 선전 경제특구의 선정 등 대내적 요소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한국과 맺게 되는 특수이익을 출현하는 과정에서 한국과 수교되는 결과를 볼 수 있지 않을 까 생각한다. 이에 대한 덩샤오핑의 남순강화는 국제경제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