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에서는 <인천 줄 풍류>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인천 줄풍류>는 1953년 인천 정악원 (仁川正樂院)이 설립되고, 지역 음악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전승되고 있는 음악이다. ... 본 논문에서는 <인천 줄 풍류>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인천 줄풍류>는 1953년 인천 정악원 (仁川正樂院)이 설립되고, 지역 음악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전승되고 있는 음악이다. 인천은 지역적으로 서울 및 경기 권과 맞이은 중요한 대도시 지역이다. 그러나 도시위상에 비해 전통과 문화에 관한 연구는 낮은 수준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전통음악에 관한 연구는 여타지역에 비해 수준이하의 상태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논자는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지역사회 문화 분야 발전에 이바지하고, 전통악의 본질에 관한 심도 있는 분석고찰을 통해 전통악의 미래지향적 발전방향제시의 목적 하에 <인천 줄풍류>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논자는 학사, 석사과정에서 경제 즉 국립국악원의 줄 풍류를 익힌바 있다. 동시에 인천지역민으로써 지역 활동을 겸해, 인천 줄 풍류를 지역 전통음악인 들에게 종신 전습하신 인천 줄풍류 보존회의 김응학 선생으로부터 구음 전수받은바 있다. 이 과정에서 경제(국립국악원) 줄풍류와 <인천 줄풍류>의 음악적 차별관계에 대해 주목하게 된바 있다. 즉 경제와 인천제는 음악내용에 있어서 이질적인 독자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두 개의 지역에 존재하는 동일명칭의 <줄풍류> 는 상호간 종속관계나 우열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볼 때 인천풍류란 당연히 경제풍류라는 식의 선입견이 존재하였다고 본다. 이 선입견에 따른 오류 적 판단은, 필자는 물론 대부분이 지역 전통악 관계 인들이 가졌던 현상이었다. 결과적으로 전통악 전승에 관한 지역적 자부심을 가지지 못하고 문화 예술적 정체성에 대해 종속적인 지역으로 전락되어 인천문화발전 의 추동력을 잃어버렸다고 본다. 따라서 논자는 <영산회상 줄풍류>라는 동일명칭에 따른 선입견에 의한, 당연히 동일관계악곡이라는 편견에 대해 본질적 의문을 가지며, 본고의 연구내용에 당하게 된 것이다. 부언컨대 줄풍류 즉, 영산회상이란 그 명칭만이 역사적인 민족적 전통가치관에 따르는 공유 사실일 뿐이며 어떤 지역과 어떤 사람에 따라서도 자유로운 개성이 담긴 차별화된 음악으로 형성 될 수 있다는 것이며, 음악 내용은 일정한 악곡형식과 틀에 억 메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며, 지역마다의 특징에 따른 변이 적 역동성을 가질 수 있으며, 전승자가 전수자에게 나름대로의 전수방식으로 전승해 왔으며, 그 자유로움을 향유해온, 분방한 변이성격을 특징으로 하는 흐름을 가진 즉흥 악곡의 명칭일 뿐이라는 것이다. 과거부터 선인들은 이러한 과정으로 곳곳에서 세대와 세대를 거쳐 나름대로 전승시켜왔다는 것이다. 그 좋은 범례가 1999년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조주우 교수와 조운조 교수가 해금2중주에 의한 <겹영산회상>이라는 별칭의 연주를 들 수 있다. 현행의 줄 풍류 영산회상은, 경제(국립국악원)나, <향제>, 또는 <누구누구의 줄 풍류> 등등으로 구별되고 있고, 어떤 것은 국가무형문화재로 대접되고, 어떤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차별화 되어 호칭되어오고 있다. 현대에 들어 여러 가지 연구 끝에 차별화된 원인으로 인하여 영산회상으로 대별되는 보편적인 명칭의 이 악곡은 악곡이 가진 형이상학적 변이성이 마치 고정악곡인양의 허상(虛想)아래 대다수 전통악 전공자들에게 왜곡전승 되고 있었다고 보여 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천지역의 줄 풍류 연구도 예외 없이 선입견에 따른 연구 불필요의 풍류로 치부되어온 것이다. 이외에도 여러 연구 장애이유가 있겠으나, 특히 전 례 한 원인들이 크다고 하겠다. 이것이 필자 연구의 시작점이라고 하겠다. 영산회상의 악곡은 몇 개의 고 악보 기록으로만 연주실체적 원형의 모습은 알 수 없다. 또한 당시 당시의 악곡이 사라져버린 확실한 이유를 알 수 없다. 현행 <영산회상상>이나 <줄 풍류>의 개개 명칭 곡들도 정확한 전승경로를 모른다. 오직 사제 간의 구전심수 등등의 방법으로 민간풍류로써 전승되어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수백 곡의 아리랑이라고 명칭 되는 민요곡이 대중화되며 각각 지역마다 어떤 상징의 상(想)을 만들면서도, 일정 틀이 없이 역동적으로 개성적으로 집단 전승되고 있는 것과 비견됨에 다름 아니다 이와 같은 <악곡명칭>의 내력을 가진 영산회상은 선고적 조사에 따른 내용을 열거한다면 1. 조선왕조 9대 성종 1493년 8월 찬정된 『악학궤범(樂學軌範)』 제5권 성종조 향악정재 도의 학. 연화대. 처용무 합설 조에 ‘靈山會上佛菩薩’이란 가사를 노래하는 궁정의 향악곡(鄕樂曲)으로 합주와 함께 노래로 불렀다는 기록. 2. 악보라는 실체로써 영산회상을 기록한 현존하는 最古本 악보는 17세기의 거문고 악보인 『이수삼산재본금고(二水三山齋本琴譜)』. 즉 기록상으로 15세기에 보이던 영산회상의 모습은 200여년 뒤 1651년 『이수삼산재금보(二水三山齋本琴譜)』속에서 이미 가사 없이 연주되던 기악곡으로 변이되었다. 3. 조운조의 이화음악 권7의 국악소사에 언급한 영산회상 성격에 관한 간접적 추론. 4. 이성천의 성신여대 출판부 발간의 근대한국예술의 발전에서 언급한 내용. 5. 황준연의 서울대학교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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