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1989년부터 1999년까지 10년의 시기에 걸쳐 카이스트 인공위성연구센터(SaTReC)가 위성기술을 습득하고 개선하는 과정을 추적하고, 그 과정에서 이를 둘러싼 사회·정치적 환경, 특히 ...
이 논문은 1989년부터 1999년까지 10년의 시기에 걸쳐 카이스트 인공위성연구센터(SaTReC)가 위성기술을 습득하고 개선하는 과정을 추적하고, 그 과정에서 이를 둘러싼 사회·정치적 환경, 특히 정부의 과학기술정책 및 그 변화와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 살펴보았다. 대학의 소규모 연구센터에 불과했던 카이스트 인공위성연구센터가 한국 최초로 위성 설계 및 제작 기술의 개발을 시도하고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이 논문에서는 이 문제를 인공위성연구센터의 기술습득 전략과 실천이라는 미시적 차원, 그리고 1980년대 후반 이후 정부의 과학기술정책과 그 변화라는 거시적 차원의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먼저, 이 논문은 기술적 세부사항에 초점을 맞추어 인공위성연구센터가 어떤 전략과 방법으로 위성을 설계, 제작, 운용하는 기술을 습득했고, 기술의 응용과 발전을 거쳤는지 그 과정을 세 가지 측면에 주목해 살펴보았다. 첫째는 인공위성연구센터 유학생들이 기술 학습을 했던 영국 서리대학 위성 UoSAT의 특징이고, 둘째는 카이스트 독자모델의 위성제작을 염두에 두고 추진했던 기술학습과 기술개발 전략, 셋째는 기술이전의 상호작용이다.
더불어 이 논문은 우리별 1호에서 3호 제작에 이르는 10년간의 인공위성연구센터 위성사업이 어떤 사회·정치적 환경에서 이루어졌는지도 살펴보았다. 우리별 2호가 발사된 1993년 한국에는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고, 이후 위성제작 사업이 정부 주도로 추진되면서 다목적실용위성 아리랑 사업의 총괄주관기관으로 항공우주연구소가 선정되었다. 이는 인공위성연구센터에 위기를 초래했고, 우리별 3호의 개발이 지연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99년 인공위성연구센터는 존립의 위기를 겪으며 위상변화를 겪었고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연구원들이 인공위성연구센터를 떠나는 사태가 벌어졌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인공위성연구센터가 축적한 위성 기술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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