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한반도의 언어 상황, 국어 문제의 해결, 한글의 성장에 주목했으며 1945~1957년까지 전개된 조선어학회ㆍ한글학회의 한글 운동에 대한 검토를 중심으로 이 시... 이 논문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한반도의 언어 상황, 국어 문제의 해결, 한글의 성장에 주목했으며 1945~1957년까지 전개된 조선어학회ㆍ한글학회의 한글 운동에 대한 검토를 중심으로 이 시기의 언어 문제를 고찰했다. 1945년 8월 해방과 함께 활동을 재개한 조선어학회는 건국기 학회가 해결해야 할 긴급한 과제로서 교과서 편찬, 국어 교원 양성, 국어강습회 실시, 월간지 『한글』 속간, 국어사전 편찬 등 주요 사업에 착수했다. 38선 이남에 대한 통치를 맡은 미군정은 교육 정상화를 위해 조선의 교육 관계자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학회는 한글 운동의 매끄러운 전개를 위해 미군정의 행정력을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최현배, 장지영 등 학회 핵심 인사들이 미군정 문교부에서 활동하게 되었고, 교과서 편찬, 교사 양성, 한글 전용 운동 등에서 양자의 협력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최초의 국어 교과서인 『한글 첫 걸음』을 비롯해서 다수의 국어 교과서가 학회에 의해 편찬되었고, 『한글 첫 걸음』에는 처음으로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가 적용되었다. 학회가 개최한 강습회는 일반적으로 ‘한글(국어)강습회’라 불렸지만, 내용상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습회와 교사 재교육을 위한 강습회, 국어 교사 양성을 위한 강습회의 세 가지 성격을 가졌다. 이 중 학회가 주력한 것은 교사 양성 강습회였고,1당시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국어 교사 수급에 크게 기여했다. 나아가 학회는 중등 국어 교사 전문 양성 기관인 세종중등국어교사양성소를 설립했는데, 건국 초기 국어 교사 전문 양성 기관을 창설했다는 것은 국어 교육사와 사범대학의 역사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학회는 우리말 도로 찾기 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 민족어 회복에 절대적 공헌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말에서 한자어를 중시하는 이들과 갈등을 빚었고, 그 결과 순우리말 대 한자어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우리말 도로 찾기 운동은 민족어의 순수성을 회복하고 한국인의 언어 정체성과 주체성을 확립한 운동으로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48년 4월 이극로는 북한의 국어 문제를 맡아달라는 김두봉의 요청을 받고 북행했다. 그의 북행 이후 월북한 김병제, 이만규 등이 조선어문연구회에서 활동했다. 조선어문연구회는 「조선어 신철자법」을 제정하고 『조선어문법』을 발간했는데, 1933년 조선어학회가 제정한 ‘통일안’의 형태주의 원칙을 고수하였고, 문법, 표준어 정책, 한글 전용 정책 등에서 남한의 조선어학회와 동질적이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극로, 김병제, 이만규 등 조선어학회 출신 학자들이 통일을 준비하면서 민족어의 동질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극로의 북에서의 활동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설립에 부담을 느낀 학회는 1949년 10월 ‘한글학회’로 개명했다. 이 논문에서는 한글세대의 등장과 한글 시대를 연 한글 전용 운동에 특히 주목하였다. 해방과 함께 학회는 한글 전용 운동에 착수하여 초중등 교과서에서 한자를 폐지했으며 한글전용법 제정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비록 한글 전용 실현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한글은 국자의 지위를 확보하였고 한글 전용은 한국어 서사의 기본 원칙이 되었다. 한글의 가치에 공감한 결과였지만, 국한문 혼용의 오랜 관습에서 벗어나 한글 전용으로 나아간 것은 우리말의 역사에서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학회에 주어진 민족적 사명 중 하나는 사전 편찬이었다. 1929년에 시작된 사전 편찬 사업은 기술적ㆍ경제적 문제, 일제의 통제 등으로 난항을 거듭했다. 첫 번째 시련은 조선어학회사건이었고, 해방 후에는 한국전쟁과 한글맞춤법간소화파동 등 난관에 부딪혔다. 한글파동은 전문 지식이 없는 통치자가 무모하게 언어 문제에 개입한 사건이었다. 이승만이 야기한 철자법 간소화는 ‘통일안’과 『큰사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자 위협이었기 때문에 학회는 ‘통일안’ 수호와 『큰사전』 발간을 위해 정부에 대항했다. 학회와 교육ㆍ문화계 등의 반대 운동의 결과, 1955년 9월 한글파동은 해소되었고, 1957년 10월 9일 드디어 『큰사전』 1-6권이 완간되었다. 이상 검토한 것처럼 해방 후 학회는 한글강습회 개최, 국어 교사 양성, 교과서 편찬 등으로 교육 정상화에 기여했으며, 우리말 도로 찾기를 통해 민족어와 민족정신을 회복했다. 북한으로 간 이극로, 김병제, 이만규 등은 남북 언어의 통일을 위해 노력했고, 한글 전용 운동은 한글 서사의 원칙을 세우고 한글세대를 배출하고 한글 시대를 열었으며, 학회는 한국어의 보고인 『큰사전』을 완간했다. 한글은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해방 후 조선어학회ㆍ한글학회가 전개한 한글 운동의 결과, 언어생활에 혁명이 일어났고 한글을 기반으로 하는 지식ㆍ정보ㆍ문화 사회의 토대가 구축될 수 있었던 것이다. Keywords: 해방, 조선어학회, 한글학회, 한글, 한글 운동, 한글 전용, 언어정책(어문정책), 우리말 도로 찾기(민족어 회복 운동), 교과서, 한글강습회, 조선어학회사건, 한글맞춤법간소화파동, 큰사전, 미군정, 문교부, 어문민족주의, 최현배, 이극로, 장지영,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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