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 식민지기 유교 지식인 海岳 金光鎭의 도시 이주와 의생 활동 그리고 지적 전환 [韩语论文]

资料分类免费韩语论文 责任编辑:金一助教更新时间:2017-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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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海岳 金光鎭(1885~1940)이라는 향촌에서 도시이주한 구 향반 출신의 유교 지식인을 통해 한말 식민지기 근대로의 전환이 초래한 일상·사회문화·사상적 변화를 해명하여 유교 지...

본 연구는 海岳 金光鎭(1885~1940)이라는 향촌에서 도시이주한 구 향반 출신의 유교 지식인을 통해 한말 식민지기 근대로의 전환이 초래한 일상·사회문화·사상적 변화를 해명하여 유교 지식인의 새로운 동향을 밝히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아울러 한국 근현대사에서 도시화가 가져온 전통과 근대의 문화횡단을 해명하고, 한말 이래 국가와 민족이 우선시되는 사회에서 개인의 긍정과 자기실현을 중시하는 사유가 등장하게 되는 역사적 변화와 그 논리를 밝히는 것도 이 연구의 또 다른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도시 이주 후의 김광진의 일상과 가족생활, 사회 활동과 직업 활동을 미시적으로 재현하는데 주력했으며, 나아가 이것들과 그의 지적 성취의 관계를 해명하고자 했다. 이러한 작업은 그가 한말 식민지기 지식인들 가운데 보기 드물게 방대한 저술과 함께 편지와 생활일기, 의학 관련 자료 등 다양하고 풍부한 각종 문헌 자료들을 동시에 남겼기 때문에 가능했다. 김광진은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향반 가문 출신으로, 독립 운동가이자, 교육자, 사회운동가, 醫生, 사상가였다. 그는 독립운동과 청년운동·교육운동에 참여했으며, 문화적 민족주의자로서 한글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향촌 출신의 그에게 도시 경험과 이주는 일상과 사회문화·지적 영역에서 심원한 변화를 가져오게 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그는 1906년~1912년 대구 友弦書樓와 協成學校에서 수학하며 근대 지식을 수용했으며, 적극적으로 독립운동과 교육·사회운동에 투신했다. 이때 맺어진 대구 지식인들과의 연망은 우현서루 學人들의 모임인 學契와 대구 민족운동가들의 詩會인 松石會를 통해 1930년대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보다 결정적인 전환은 1924년 대구로 이주하면서 이루어졌다. ‘향촌에서 도시로의 이주’는 향촌에서 義理를 추구하는 전통적인 향반의 삶과 결별하여 俗利의 세계인 도시에서 살아가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김광진이 도시 이주를 결심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자식들의 교육문제였으나, 농촌 생활의 어려움과 청년운동을 통해 얻게 된 自立과 自助에 대한 인식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도시 생활에서 가장 큰 문제는 교육과 혼사였는데, 新舊를 비롯하여 세대·젠더·경제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가족들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한편, 도시에서 생계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의생’이라는 직업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의생은 의사보다 낮은 지위로 규정되었고 근대 의료체계에서 소외된 존재였으나, 열악한 의료상황 속에서 실제로는 위생행정과 의료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던 전문 직업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의생으로서 그는 전통 의학을 견지하면서도 근대 의학과 치료법을 적극 수용하여, ��醫學升降法��이라는 새로운 한의학 이론서를 저술했다. 이러한 전통과 근대의 문화횡단은 실제 의료행위와 영업지 선택, 의원 경영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듯 김광진이 도시 이주 후에 겪게 된 일상과 사회문화 영역에서의 마찰과 긴장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새롭게 등장한‘도시인’의 탄생과 곤경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곤경 속에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機學’과 ‘知情欲論(鼎足論)’으로 정리했다. 기학이란 사건의 기미를 탐구하여 미래를 예측하는 학문이란 뜻으로, 과학적·논리적인 방법으로 진리를 추구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사회를 예측·변화시키고자 하는 김광진의 지식탐구 자세와 사회과학적 인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민족의 독립을 최종 목표로 삼는다는 점에서 문화적 민족주의자로서의 김광진의 면모를 재확인할 수 있다. 또한 지정욕론은 인간을 지식·감정·욕망의 삼위일체 즉, 鼎足으로 파악하는 김광진의 새로운 인간론이다. 특히 그는‘욕망’을 신체에서 기인한 불가피한 것으로 보고, 이를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19세기 중엽부터 문화예술 영역에서 강렬하게 분출되었던 욕망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이론화시켰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적지 않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기학과 지정욕론은 19세기말 제국주의의 침략 앞에서 국가와 민족을 우선할 수밖에 없었던 당대 주류 담론들과 대화를 지속하면서도, 개인의 욕망을 긍정하고 이를 확장할 수 있는 논리를 체계화시키고자 노력했던 김광진의 이중적 전략을 대변하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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