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에는 이름이 알려진 문이 여덟 개가 있다. 그 가운데 조선 초기부터 숭례문이 남대문, 흥인문이 동대문, 소의문이 서소문, 혜화문이 동소문이라는 속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나머... 한양도성에는 이름이 알려진 문이 여덟 개가 있다. 그 가운데 조선 초기부터 숭례문이 남대문, 흥인문이 동대문, 소의문이 서소문, 혜화문이 동소문이라는 속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나머지 문들은 대문(大門)이나 소문(小門)에 포함되지 않았다. 조선 후기부터 모든 도성 문을 대상으로 공식적으로 그 위상을 구분한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니, 그것이 바로 정문(正門)과 간문(間門)이다. 정문에는 숭례문ㆍ흥인문ㆍ돈의문ㆍ혜화문이, 간문에는 광희문ㆍ창의문ㆍ숙정문ㆍ소의문이 해당되었다. 흥인문(興仁門)은 도성의 정동(正東)방향에 있는 정문이고, 광희문(光熙門)은 도성의 동남쪽에 있는 간문이다. 흥인문은 위치와 형태는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좌우 성벽이 훼철되어 문으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렸다. 광희문은 1974~1975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서 위치가 12m 남쪽으로 옮겨졌다. 이처럼 두 문은 현재 도성 문으로서 기능과 형태 일부가 훼손되었으나 홍예문은 비교적 원형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문루 역시도 흥인문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광희문은 조선시대 당시의 원 문루와 비슷하게 복원되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흥인문과 광희문은 홍예문의 크기와 문루의 외관에 차이가 있다. 흥인문이 광희문에 비해 홍예문의 폭과 높이가 더 크게 조성되어, 두 문을 출입하는 물체의 크기와 인원 수 등에 차이가 있었다. 또한 흥인문은 문루를 중층으로, 광희문은 단층으로 만들어 두 문의 위용에 차이를 두었다. 이러한 두 문의 형태적 차이는 정문과 간문이라는 두 문의 위상이 형태에 표현된 것이다. 흥인문과 광희문은 형태 뿐 아니라 출입에서도 차이가 나타난다. 상장례의 경우를 보면 신분에 따라 장지(葬地)로 향할 때 이용한 문로(門路)에 차등이 있었다. 서울의 동쪽의 장지로 향할 때 거의 모든 사람들은 광희문으로 나갔다. 이에 비해 임금과 왕비, 그리고 특별한 경우 임금의 생모인 몇몇 후궁은 흥인문을 이용하였다. 이러한 흥인문과 광희문의 형태와 기능의 차이는 곧 정문과 간문의 차이이다. 정문과 간문은 모두 도성 문으로서 왕도인 한성부를 대표하는 시설물이었다. 그런 가운데 예(禮)와 같이 특별한 경우, 정문은 간문에 비해 임금과 더 관련이 깊었다. 때문에 형태상으로도 성문 자체의 규모를 크고 위용있게 조성하여 정문으로서의 위엄과 중요성을 드러내었다. 이에 비해 간문은 임금과 왕비 이하의 신분과 더 밀착되어 있었으므로 같은 도성 문이지만 정문에 비해 작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처럼 정문과 간문은 조선의 핵심 요소인 예가 구현되는 공간으로서 단순한 건축물이 아닌 당시 조선 사람들의 삶과 생활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정문과 간문의 기능은 모두 사라졌으며, 도성 문은 단순히 그 형태 중심으로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도성 문의 본질과 가치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형태 뿐 아니라 그것이 살아있을 때의 본래의 기능과 위상에도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도성 문을 하나의 문화자원으로 활용, 향유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There are 8 gates in the Seoul City Wall with known names. Among them, since the early Joseon era, Sungnyemun(崇禮門), Heunginmun(興仁門), Souimun(昭義門), and Hyehwamun(惠化門) were commonly called Namdaemun(南大門), Dongdaemun(東大... There are 8 gates in the Seoul City Wall with known names. Among them, since the early Joseon era, Sungnyemun(崇禮門), Heunginmun(興仁門), Souimun(昭義門), and Hyehwamun(惠化門) were commonly called Namdaemun(南大門), Dongdaemun(東大門), Seosomun(西小門), and Dongsomun(東小門) respectively. The rest of the gates were not included in the Main Gates(大門) or Auxiliary Gates.(小門) Since the late Joseon dynasty, there was a new concept that officially classified the statuses all gates of the city wall which were Jeongmun(正門) and Ganmun.(間門) Jeongmun included Sungnyemun, Heunginmun, Donuimum, and Hyehwamun, and Ganmun included Gwangheemun, Changuimun(彰義門), Sukjeongmun(肅靖門), and Souimun. Heunginmun is a Jeongmun which is located in the eastern side of the city wall, and Gwangheemun(光熙門) is a Ganmun that is in the south eastern side of the city wall. Heunginmun has the same location and form of the days past but due to the demolition of the walls on the sides of the gate, it has lost its function as a gate. Gwangheemun was reconstructed between 1974 and 1975 and the location was moved 12 m south. Like this, the 2 gates have partially damaged function and form as city wall gates but Hongyemun(虹霓門, an Arched Gate) is relatively keeping its original form. The Moonru(門樓, the Gate Tower) of Heunginmun is also maintaining its original form and for Gwangheemun, there is significance in that the Moonru was restored similarly to the original one from the Joseon era. Heunginmun and Gwangheemun has differences in size of Hongyemun and exterior of Moonru. Compared to Gwangheemun, the width and height of Heunginmun composed larger which meant there were differences in the size of objects and number of people that passed the gate. Also Heunginmun has Moonru with multi roofs and Gwangheemun has a single roof which results in the differences in grandeur. These differences show that the status of two gates, Jeongmun and Ganmum, .is expressed into the exterior of the gates. There are also differences in exiting and entering Heunginmun and Gwangheemun. Looking at funerals, according to social status there were differences in the gates to be used when heading in the direction of the burial grounds. Almost all people who were going to the burial grounds east to Seoul exited through Gwangheemun. On the other hand, the king and queen, and in special cases a few Royal concubines used Heunginmun. These differences in form and function between Heunginmun and Gwangheemun is the difference between Jeongmun and Ganmun. Jeongmun and Ganmun are both city wall gates and were facilities that represented Hanseongbu, a Royal Capital City. Meanwhile, for special cases such as cortices, Jeongmun had closer relation to the King compared to Ganmun. Therefore even in form, the size of the wall itself was composed majestically large to emphasize the status and importance as a Jeongmun. On the other hand, Ganmun was built smaller due to its closer relation to people with statuses under that of the king and queen. As above, Jeongmun and Ganmun both had unique functions and form also had meaning. Therefore to discuss the nature of the gates of the walls, as well as form, function, status, and also the cultural value of the city wall gates must be noted. When this change in awareness occurs, the basis for utilizing city wall gates as cultural resources will be created. ,韩语论文,韩语论文网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