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주의가 남긴 유산을 따져 물으며 새로운 문화적 정체성을 세우고자 하는 포스트식민주의는 오늘날 복합적인 과제를 안고 있다. 과거 식민주의가 남긴 정신적인 유산의 극복과 함께, ‘...
식민주의가 남긴 유산을 따져 물으며 새로운 문화적 정체성을 세우고자 하는 포스트식민주의는 오늘날 복합적인 과제를 안고 있다. 과거 식민주의가 남긴 정신적인 유산의 극복과 함께, ‘문화제국주의’라고 불리는 오늘날의 비가시적인 문화적·경제적 종속 관계에 저항해야 하고, 또한 국민국가의 경계가 사라지는 포스트민족시대에 ‘민족을 넘어서는’ 미래를 전망해야 한다. 본 연구는 포스트식민국가에서 산출되는 문화적 텍스트는 과거 식민지배와의 대면을 치열하게 고민하면서도 그 대결을 ‘넘어서는’ 것을 제시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에 본고는 식민시기를 재현하는 세 편의 문화적 텍스트의 비교분석을 통해 텍스트가 함의하고 있는 포스트식민주의 사유와 전략을 알아보고, 이것이 포스트민족주의의 미래에 대해서는 어떠한 전망을 할 수 있는지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분석 텍스트는 외국 문학 작품인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1958), 한국 텍스트이자 문학작품의 각색 시나리오인 <족보>(1978), 한국 텍스트이면서 오리지널 시나리오인 <YMCA 야구단>(2002)이다. 본고의 초점은 단순히 텍스트 분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식민과거를 다루려는 문화적 텍스트가 식민유산을 직시하면서도 민족을 ‘넘어서는’ 전망을 담기 위해서는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하는가? 하는 실천적인 창작방법론 모색에 있다. 다음의 네 가지 질문을 던지며 텍스트 분석을 진행한다. (1) 식민지 시대를 어떻게 재현하는가? (2) 식민주의 지배담론을 어떻게 재현하는가? (3) 서로 다른 문화적 접촉으로 생겨나는 혼종은 없는가? (4) 식민주의에 어떻게 저항하나?
텍스트에 접근하는 방법론은 에드워드 사이드와 호미 바바의 포스트식민주의 이론이다. 사이드로부터 제국의 지배논리에 대한 명쾌한 분석적 시각을 얻고자 함이며, 바바로부터는 사이드가 간과했던 제국-식민 간의 ‘상호작용’에 주목함으로써 식민지배와의 대면을 균형적으로 독해할 수 있는 시각을 얻고자 한다. 바바의 문화적 혼종은 어느 정체성(식민지배자일지라도)도 견고하지 않으며, “어떠한 정체성도 순수한 것으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바바의 이론은 제국-식민의 적대적인 세력 간의 친연성을 발견하게 해준다. 또한 식민지 공간뿐만 아니라 오늘날 전 지구적으로 문화적 정체성이 재위치해가는 포스트민족시대의 문화공간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각 텍스트는 저마다 산출된 역사적인 배경과 창작 시기, 작가(감독)의 역사인식, 미적의식에 따라 조금씩 다른 특징들을 보였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에서 아체베가 주력하는 것은 과거 아프리카인들의 문화와 역사를 객관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이다. 작가는 전통사회의 결함과 미덕을 모두 드러냄으로써 두 가지 아이러니한 목표를 달성한다. 하나는 아프리카를 ‘역사가 없는 텅 빈 공간’으로 규정한 중심부 지배담론을 전복하여 아프리카에도 엄연히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던 영토임을 증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식민화의 책임을 아프리카 전통사회 또한 피할 수 없다는 반성을 보이는 것이다.
아체베가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방식은 소설의 ‘플롯 방식’에 있다. 결말부분에서 백인판사에로의 시점전환은 제국주의자에 의한 “무감각할 정도의 도식화”를 통해서 아프리카의 고유한 문화적·역사적 영혼과 개성이 거세되는 과정을 극적으로 제시한다. 20년 후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1978)에서 폭로한 제국주의의 심성과 이데올로기를 문학작품 속에서 알레고리 형식으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아체베는 서구 제국주의에 대해 ‘비난’을 퍼붓기보다는 그들로 하여금 “안으로의 여행”(the voyage in)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족보>에서 식민주의 지배담론에 저항하는 주체는 조선인 ‘설진영’과 일본인 ‘다니’이다. 아체베 텍스트가 '영웅주의'를 말하는 대신 제국주의 담론 속에서 아프리카의 역사와 문화가 소멸되었던 메커니즘을 고발하는 것으로 대항담론을 제시하고 있다면, <족보>는 설진영의 죽음을 영웅적인 죽음으로 끌어올려 강한 민족 정서를 강조한다.
설진영을 통한 과도한 민족 애착과 다른 지점에 ‘다니’의 식민지적 혼종성이라는 포스트민족주의 기호가 있다. 다니는 대립적인 두 문화가 조우하는 콘택트존(contact zone)에서 생겨난 의외의 목소리이다. 식민지 태생의 다니는 조선과 일본, 그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경계인으로 중심부를 열망하지 않는 초연함을 보인다. 식민지배자와 식민지인 사이의 주인/노예 관계는 다니에게 있어서 ‘상호의존적’인 관계로 발전해 나간다. 다니는 식민지배자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불안한 양가성(바바의 표현을 빌자면, “아버지인 동시에 억압자, 혹은 삼가면서 강탈하는 것”)을 또렷이 의식한다. 이러한 자의식을 토대로 다니는 비인간적인 식민주의에 맞선다.
이 ‘불순한’ 잡종의 정체성은 우리에게 식민경험을 포스트민족주의적으로 재독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즉, 식민 역사에는 대결과 보복의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 토착적 문화주의나 반(反)식민 민족주의라는 예각을 날카롭게 세우지 않아도 문화적 섞임을 통해서 식민지배와의 대면을 ‘사실적으로’ 그릴 수 있다는 것, 식민경험을 ‘상호침투’로 독해함으로써 낡은 민족적 적대감을 버리고 포스트식민적 미래에 대해 좀 더 관용적인 전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 등을 제시한다.
다니가 식민지 주변부의 경험에 의해 생겨난 지배자의 혼종이라면 <YMCA 야구단>에서 민정림은 중심부를 체험한 식민지 주변인에서 일어나는 혼종이다. 서구적인 것과 토착적인 것이 혼재된 정림은 전통보다 서구적인 것에 더 경도되어 있다. 그녀에게 서구중심부는 절대적으로 선한 것, 우월한 것, 진리다. 그러나 어느 순간 영화는 정림이 ‘스스로’ 중심부를 해체하는 궤적을 보여준다. 여성 서발턴에게 찾아온 ‘탈중심화’의 순간은 이 영화 텍스트만이 보여주는 독특한 포스트식민적 사유의 지점이다.
민족 갈등뿐만 아니라 세대·계급·젠더를 둘러싼 내부 식민주의의 문제를 조감하고 있는 영화는 기존의 항일영화가 만성적으로 재현하곤 하는 이항대립의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 ‘마패’, ‘암행어사’라는 기호로 죽어버린 조국을 부활시키는 시대착오적인 전략은 애국심과는 또 다른 정서로 관객을 안내한다. 그것은 식민 역사를 피 튀기는 것으로만 보지 말 것을, 식민지배와의 대면을 피해의식을 갖고 수세적으로만 독해하지 말 것을 일러준다. 또한 호창의 얼굴에서 보이는 시대착오적인 미소는 위로를 넘어 관용을 말한다. 이 종잡을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미소는 식민 역사에서 누가 지배자고 누가 지배당하는 주체인지 그 위계를 뒤흔들고 중심부와 주변부 간의 이항대립과 차이를 무화시킨다.
<족보>에서는 다니라는 ‘별종’이 식민경험을 포스트민족주의적으로 독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면, <YMCA 야구단>에서는 주변부 서발턴들이 자아/타자, 중심/주변, 제국/식민, 식민지배자/식민지인의 위치를 흩트려버린다. 승리자와 희생자의 위치를 교묘하게 뒤바꾸며 식민지인들이 단순히 역사의 희생자가 아니라는 역설을 들려준다. 이 대항서사가 희망하는 포스트민족주의 전망은 다음과 같다. 식민 역사를 낡은 민족적 대립만으로 보지 말 것, 다른 자아를 향해 무장을 갖추지 말고 ‘공존’을 준비할 것, 그리고 우리의 정체성 또한 언제나 재위치시키고 새로이 탄생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둘 것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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