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이극로((1893-1978)가 남긴 방대한 문헌을 검토하여 일제시대에 그가 전개한 민족운동과 그 연장선에 있었던 한글운동을 연구한 것이다. 이 연구는 이극로의 삶과 활동을 민족운동에... 본 논문은 이극로((1893-1978)가 남긴 방대한 문헌을 검토하여 일제시대에 그가 전개한 민족운동과 그 연장선에 있었던 한글운동을 연구한 것이다. 이 연구는 이극로의 삶과 활동을 민족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1910년대 독립운동가로서의 측면, 1920년대 민족주의 역사가로서의 활동, 1930·40년대 한글운동가로서의 활약상을 규명하였다. 이극로는 국권회복 단체인 대동청년단에 가입(1909)한 뒤, 1910년 일제가 조선의 주권을 강탈하자, 1911년 독립군이 되려고 만주로 갔다. 1911년에서 1914년까지 민족운동가 신채호·박은식·윤세복과 교유하면서 동창학교와 백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독립군을 육성하였고, 자신도 이진룡·홍범도 등이 조직한 포수단에 참여하여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 1916년에서 1921년까지 상해·북경 시절에 그는 상해 유학생 총무로써 임시정부의 요인을 돕는 활동을 하였고, 신채호·김원봉·김동삼 등과의 교유를 통해 절대독립론을 신봉하게 되었으며, 그것의 연장선에서 신채호의 성토문에 서명했다. 1922년에서 1928년까지 유럽 시절에 그는 베를린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하면서 항일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두 가지 방향으로 활동하였다. 첫 번째는 항일선전투쟁을 전개하였다. 재독한인대회(1923)를 개최하여 관동 대지진시 일제가 조선인을 학살한 만행에 대해 규탄하였다. 또 세계피압박민족대회(1927)에 조선대표 단장으로써 이미륵·김법린·허헌 등과 참여하여 한국에 대한 일제의 식민 지배를 신랄히 비판하였다. 두 번째 방향은 한국근대사 저술을 통한 홍보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조선의 독립운동과 일본의 침략정책}(1924)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한 조선의 독립투쟁}(1927)을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서술하였다. 이 책을 발간하여 그는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의 실상과 이에 맞선 조선인의 독립투쟁을 유럽에 홍보하였다. 이로써 그는 민족주의 역사가로서의 위상을 확보하였다. 1929년 귀국한 뒤 그는 비타협 민족주의자로써 민족운동과 그 연장선에서 한글운동을 거족적 민족운동으로 전개하였다. 민족적 차원에서 사전편찬운동을 하고자 하여 좌·우익을 망라하여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1929)하고 운영해갔다. 민족어의 규범을 수립하고자 조선어연구회의 이름을 조선어학회로 개명(1931)한 뒤, 한글운동의 기획자로서 조선어학회의 동료 임원들과 함께 한글맞춤법 통일안 제정(1933)과 표준어 사정 작업(1936)에도 좌·우익을 가리지 않고 많은 인사를 참여시켰으며, 이에 대한 반대를 돌파하는데도 좌우익의 지지를 이끌어 내어 이를 관철하였다. 아울러 외래어표기법 통일안도 10년간 추진하여 완성(1940)하였다. 조선어사전 편찬을 완수하던 그는 1942년 10월에 일제의 탄압을 받아 함흥감옥에 갇혔다가 해방 이후에 출옥하였다. 이극로 등을 중심으로 조선어학회가 이룩한 업적들은 해방 후 남북한 언어정책의 초석이 되었다. 1930년대 조선어학회의 한글운동은 이극로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는 동료임원과 함께 일제의 동화정책에 맞서 한글을 정리·보급·유지하여 민족을 보전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윤재·신명균·최현배 등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한글운동을 추진하면서, 사회주의 세력과 타협민족주의 세력의 지지도 이끌어 내며 거족적 민족운동으로 전개하였다. 이런 점에서 이 시기 한글운동은 합법적 공간 안에서 전개된 민족협동전선운동이었다. 이로써 그는 1930년대 조선어학회의 한글운동을 주도한 인물이었다는 위상을 확보하였다. 본 논문은 일제시대 이극로의 위상을 독립운동가, 민족주의 역사가, 한글운동가로써 자리매김을 하였다는 점과 1930년대 한글운동이 거족적 민족운동이었다는 점을 밝혔다는 데에서 그 의미를 가진다. ,韩语论文,韩语论文网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