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재번역은 과연 왜 이루어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구하고자 하였다. 재번역이라는 현상이 번역과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본 연구는 시대별 도착어 국가 시스템의 ...
본 연구는 재번역은 과연 왜 이루어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구하고자 하였다. 재번역이라는 현상이 번역과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본 연구는 시대별 도착어 국가 시스템의 특징, 출판 번역 상황, 번역 결과물 분석 등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 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자 하였다.
본 연구는 광복 이후부터 현재까지 출간된 스탕달의 『적과 흑』의 번역본 중, 국립 중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번역본 총 66종 79권의 분석을 실시했으며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였다.
첫째, 도착어 국가 정치 체제의 변화는 재번역을 유발하는 요인이다. 개화기 이후 서구 문학을 수용하기 시작한 우리나라는 외국 문학 수용 초기에 원작을 번안하여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당시 번안은 단지 원작의 내용을 한국 독자들이 익숙한 내용으로 대체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설인 원작이 희곡으로 바뀌는 등 장르의 변화도 발생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역본이나 일역본을 사용한 중역이 빈번하게 이루어졌으며 일본어 중역은 일제 식민지를 거치는 과정에서 더욱 높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일역본을 출발어 텍스트로 사용한 번역문의 경우, 일본식 외래어 표기법, 일본식 표현, 언어적 차이나 문화적 차이로 설명하기 힘든 삭제가 빈번하게 발견된다는 점에서 번역문으로서의 한계를 드러냈다.
중역과 관련해서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해방 이후 상당 기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원전이 아닌 일역본을 사용하는 중역 관행이 암암리에 지속되어 일본에 대한 은밀한 문화적 종속이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번안이나 중역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 텍스트의 장르, 내용, 형식 면에서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라고 간주하기 힘든 번역이라는 점에서 재번역을 통한 원전의 완역 소개 필요성을 제기한다.
둘째, 통시적으로 발생하는 언어의 변화는 재번역을 유발하는 요인이다. 출발어 국가 언어의 변화 과정에서 어느 특정 순간의 언어로 쓰여 형태가 굳어진 원문은 영원한 생명력을 지니게 되지만 번역문은 원문과 동일한 기능, 의미, 효과를 지닌 텍스트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번역 시점 도착어 국가의 언어 상황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가변적인 도착어 국가의 언어 상황을 반영하여 수행되는 통시적 관점에서의 재번역은 번역문이 지닌 생명력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도착어 국가에서 원문이 새로운 생명을 획득하여 존속하게 하는 작업으로 간주할 수 있다.
본 연구의 분석 대상이 최근 5-60년 사이에 발간된 도서들에 국한됨에도 불구하고, 과거 출판된 번역문에서는 최근에 출판된 번역문에는 발견되지 않는 예스러운 한자어 일반 어휘나 한자 외래어, 한자어 호칭을 비롯해 어색한 외래어 사용이 눈에 띄었다. 이와 같이 현대 독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표현들은 번역문의 이해를 방해할 수준은 아니지만, 번역문이 오래되었거나 낡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재번역을 유발하는 주요 동기가 될 수 있다. 본 연구는 통시적으로 생산된 다양한 시대의 재번역 분석을 통해 보다 현대적이고 오늘날 언어 양태(樣態)에 부합하는 번역문이 생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셋째, 외래어 표기법이나 문장 부호 표기법 내지는 문자 배열 원칙 등 도착어 국가의 언어 관련 법규의 변화는 재번역을 유발하는 강력한 원인이다. 출판 문학 번역의 발주자인 출판사들이 기존의 번역문이 낡았거나 구식이기 때문에 현대 독자들의 감수성에 호소할 수 있는 현대적인 번역을 소개해야 한다는 이유로 재번역의 필요성을 주장할 때, 언어의 변화가 이 같은 현상을 유발하는 유일한 원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번역가의 주관적인 어휘 선택의 차이라는 변수를 통제하기 위해서 동일한 번역가가 번역한 서로 다른 시대의 번역을 비교해 본 결과, 고어(古語), 사어(死語) 등 도착어 어휘의 의미 변화나 의미 소멸로 인한 재번역 못지 않게 어휘 혹은 문장 부호의 표기법, 문자 배열 방식 등 언어 법규의 변화로 인한 재번역이 빈번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표기법의 변화가 언어의 변화 못지않게 독자들에게 번역문이 낡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음을 입증한다.
넷째, 광복 이후 현재까지 국내에서 출판된 『적과 흑』 재번역본의 수가 지나치게 많은 것은 표절본과 재출판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다. 기존의 번역본과 토시 하나 다르지 않은 번역본이 동일한 번역가의 번역에서는 물론 다른 번역가의 번역본에서도 발견되었다. 다른 번역가의 기존 번역본과 차이가 발견되지 않는 역본은 2차 저작물로서의 번역문의 번역가 저작권을 침해한 사례로 판단된다.
뿐만 아니라 『적과 흑』을 번역한 번역자 총 28명 중 16명이 동일한 출판사 혹은 다른 출판사에서 번역문을 출간하였는데, 번역문들 간에 외래어와 문장부호 표기법을 제외하고는 유의미한 차이를 발견하기 힘들었다. 이들 역본 간에 텍스트 내용적인 차이는 거의 없는 상태에서 단지 가격과 판형 및 제본, 곁텍스트적 요소 등 도서의 형태와 관련된 차이만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이들 번역본은 재번역이 아닌 재출판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출판사에서 이미 동일한 원작의 번역을 출판한 경험이 있는 번역가의 번역본이라 할지라도 번역가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재판, 중판 등의 어구도 명시하지 않은 채 기존 번역본을 새롭게 편집하여 출간한 경우 역시 2차 저작물로서의 번역문의 저작권이 훼손된 사례로 판단된다. 표절과 재출판이라는 현상은 특정 시대에 국한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광복 이후 현재까지 출간된 재번역본 전반에 걸쳐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서양 고전 문학 작품의 번역과 관련 과거 우리 출판 문화의 후진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섯째, 재번역은 번역가 고유의 번역관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원문의 다양한 매력을 드러낸다. 재번역은 비단 기존 번역이 낡았거나 결함이 있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문학 작품은 다양하게 해석되고 읽힐 수 있는 열린 구조를 지닌 텍스트이다. 이는 도서를 최종적으로 소비하는 일반 독자 뿐만 아니라 텍스트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이해한 후 이를 재현하고자 노력하는 번역가에게도 해당된다. 번역가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원작을 이해한 후, 번역문을 생산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지만, 번역가에 따라 원작의 문학성을 결정짓는 요소를 해석하고 재표현 하는 방식은 상이할 수 있다. 특히 은유적 표현이나 언어 유희 등 출발어의 기표-기의 결합 관계를 도착어로 재현하기 힘든 경우, 원문의 특정 부분이 손실되거나 보완되는 경향을 보였다.
출발어와 도착어는 그 언어 및 문화 체계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단 한 번의 번역으로 의미와 형태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다층적이며 복합적인 원작 문학 작품과 동일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번역을 생산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공시적·통시적으로 생산되는 재번역은 번역문이 원문에 비해 열등하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보다는 번역 시점의 언어 관습을 반영하여 개별 번역가가 제시하는 다양한 해석 및 이해 방식을 통해 원문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작업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각각의 번역가가 제시하는 번역 방법은 서로 상충 관계에 놓여 있기 보다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하며, 원문의 총체적인 의미를 구성하는데 기여하여 궁극적으로 원작을 온전히 파악하는데 기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본 연구는 재번역을 유발하는 원인으로 추정되는 동기를 다섯 가지 제시하였다. 본 연구가 가질 수 있는 일부 한계에 대한 지적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시스템 이론을 비롯하여 다양한 문학 번역 관련 이론을 이론적 토대로 사용하여 국내에서 통시적 공시적으로 출판된 재번역을 번역 주체별로 유형화하여 각 유형의 특징을 밝혀냈다는 점에서 본 연구의 의의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번역학적인 측면에서 재번역의 양상에 대한 기술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본 연구의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시대를 초월해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고전의 경우, 재번역을 통해 작품의 숨겨진 매력을 발굴하고 작품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는 점에서 향후 재번역은 꾸준히 기획 추진될 것이다. 이 때 본 연구의 결과가 참고 자료로 활용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본 연구를 바탕으로 향후 기타 불문학 작품의 불한 재번역에 대한 다각적인 추가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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