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조선시대 관왕묘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고찰하고, 그 의미를 고찰한 것이다. 丁酉再亂(1597~1598) 당시 明軍에 의해 조선 각지에 건립된 관왕묘는 조선후기 각 시기별...
본 논문은 조선시대 관왕묘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고찰하고, 그 의미를 고찰한 것이다. 丁酉再亂(1597~1598) 당시 明軍에 의해 조선 각지에 건립된 관왕묘는 조선후기 각 시기별로 인식의 변화를 경험하였다. 대체로 18세기 이전까지 조선 조정은 관왕묘를 부정적으로 인식하였지만, 18세기에는 관왕묘에 켜켜이 쌓인 기억들 중 특정한 기억만이 조명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관왕묘는 중앙 조정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한 국가 祀典으로 재탄생하였다. 이후 관왕묘에 대한 조선 조정의 관심은 영조와 정조 그리고 19세기 후반 고종의 치세에 따라 시기별로 다양한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17세기 이전까지 조선에서 관우는 『삼국지』나 『자치통감』, 『통감강목』과 같은 역사서에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로 인식되었으며, 관우에 대한 특별한 인식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을 계기로 관우를 신으로 숭배하는 중국의 관우신앙이 조선에 전래되었고, 그 결과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관왕묘가 건립되었다. 하지만 관왕묘는 처음부터 조선의 의지나 관우에 대한 인식과는 전혀 무관하게 건립된 것이었고, 정유재란 이후 두 차례의 호란과 삼전도 항복이 잇달아 발생하였던 17세기 후반에는 후금(청)의 사신뿐만 아니라 명나라의 사신들까지도 관왕묘를 둘러싸고 각종 폐단들을 자행하였다. 이처럼 정유재란 이후에도 관왕묘에 17세기의 불안한 국제정세와 兩亂의 기억이 직접적으로 덧씌워지게 되자, 조선의 지배층은 대체로 관왕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형성하였다.
관왕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18세기 숙종 대를 기점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18세기에는 국왕의 관왕묘 친제가 빈번하게 이루어졌으며, 관왕묘가 공식적으로 국가 제사에 포함되는 등의 변화가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는 관왕묘를 통해 명나라가 망한 이후에도 여전히 명나라를 事大의 대상으로 보려는 ‘尊周義理’와 선왕의 사업을 잇는다는 ‘繼述’이라는 두 가지 권위를 동시에 확보하려 한 조선후기 국왕들의 의도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 조선후기 국왕들이 관왕묘에서 강조하였던 ‘존주의리’는 명나라에 대한 기억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적어도 외형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오히려 당시 적극적으로 관우를 ‘유교화’하려 하였던 청나라의 모습과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였다. 이는 ‘중화’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 중 ‘문화’만을 선택적으로 강조한 ‘조선중화의식’이 지니고 있었던 근본적 한계였다.
이후 19세기 전반에는 관왕묘에 대한 조정의 관심이 점차 쇠퇴하는 가운데 민간에서는 관우신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서울 관왕묘가 훼손되는 일이 잦아졌으며, 관우신앙은 점차 기복적인 성격을 짙게 지니는 민간신앙으로 기능하였다. 하지만 조선의 지배층은 어디까지나 이를 유교적인 틀 안에서 이해하려 하였으며, 고종 또한 국가제사의 틀 안에서 관왕묘 치제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조선왕조가 멸망한 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한국사회의 관왕묘는 巫俗的인 성격을 짙게 지니며 오늘날까지 유지되어오고 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하다. 18세기 국왕들에 의해 관왕묘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게 되자, 관왕묘에 대한 인식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조선을 구원해 주었던 ‘재조지은’의 이념과, 관우의 ‘충의’만이 강조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기억의 역사’라는 학문적 주제와 관련하여서도 매우 흥미로운 주제가 된다. 관왕묘라는 공간은 물리적으로 실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공간에 켜켜이 쌓여 있는 여러 가지 기억 중, 누구에 의해 어떠한 기억이 선택되고 또 망각되어 가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조선후기에 나타난 관왕묘에 대한 인식의 변화 과정은 조선후기 국왕들이 끊임없이 확보하고자 하였던 ‘권위의 원천’이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하는 데에도 일정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18세기 이후 조선의 국왕들은 ‘중화’를 상징하는 大報壇을 건립하여 명나라의 황제들을 제사지내는 것과 동시에 조선의 창업군주인 太祖의 史蹟을 정비하고 선조에 대한 현창 사업을 벌여나가며 끊임없이 자신의 권위를 확립해 나가고자 하였다. 이는 쉽게 ‘왕권강화’라는 단어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사대’와 ‘유교(성리학)’라는 가치를 바탕으로 건국된 조선왕조에서 ‘왕권강화’는 어디까지나 국왕의 권위를 보장해주는 ‘명분’의 확립 위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때 ‘사대’란 조선왕조가 건국될 당시부터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까지 의식적으로나마 지속되었던 명나라와의 책봉-조공 체제를 의미하며, ‘유교’란 조선왕조가 건립된 이후 끊임없이 추구하였던 조선의 ‘유교화’ 과정을 일컫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명나라의 遺址였을 뿐만 아니라 先王들이 몸소 치제하였고, 그 스스로가 忠義와 같은 유교적 가치의 화신이기도 하였던 관우를 기리는 관왕묘는 조선후기 국왕들이 고민하였던 권위와 명분의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해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장소로 여겨졌다. 요컨대 조선후기 관왕묘는 조선후기 국왕들이 확보하고자 하였던 권위의 원천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명분을 가장 효과적으로 강조하고 현창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공간으로 인식되었고, 바로 이 점에서 조선후기 관왕묘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지니는 특수성과 역사적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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