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조선 초기 고분벽화에 보이는 십이지 도상 연구 [韩语论文]

资料分类免费韩语论文 责任编辑:金一助教更新时间:2017-04-28
提示:本资料为网络收集免费论文,存在不完整性。建议下载本站其它完整的收费论文。使用可通过查重系统的论文,才是您毕业的保障。

연구고려시대에 새로운 유형의 십이도상이 유입되어 조선 초기까지 계승·변용되는 과정을 고분벽화에 표현된 십이도상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부족한 고려 고분벽화의 연구...

본 연구는 고려시대에 새로운 유형의 십이지 도상이 유입되어 조선 초기까지 계승·변용되는 과정을 고분벽화에 표현된 십이지 도상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부족한 고려 고분벽화의 연구를 보충하고, 통일신라시대와 조선시대로 나뉘어 분절되었던 한국 십이지 도상의 연구를 하나의 축으로 연결하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십이지는 우주·자연의 이치와 운행 원리를 나타내는 추상적 개념으로 고대의 중국인들은 이를 쉽게 표현하기 위해 열두 동물에 대입하여 시각화하였다. 이에 따라 다양한 유형의 십이지 도상이 등장하였으며, 주로 무덤 속에 당시의 우주관을 구성해내거나 죽은 이를 인도하고 수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장의미술 분야에서 사용되었다. 한반도에서 십이지 도상은 사람의 몸에 동물의 머리가 합쳐진 모습의 부장용 명기로 처음 등장하였으며, 통일신라 왕릉의 봉분 둘레에는 환조 혹은 부조의 십이지상이 제작되어 배치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고려 왕릉의 병풍석 부조에도 계승되었는데, 이처럼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십이지 도상은 人身獸首形을 일관되게 유지하였다. 그러나 고려 중기에 이르러 고분벽화를 중심으로 사람이 동물형 관모를 쓴 모습의 새로운 십이지 도상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人身獸冠形 십이지 도상의 등장은 외래 종교사상의 수용과 더불어 외래 도상의 유입이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송·요와 문화적·경제적인 교류관계를 형성하였고 이에 따라 고려 예종대에 이르러 송의 도교 사상과 관련 법식이 고려로 전래되어 관방도교 체제가 정립되었으며, 요의 멸망 이후로는 거란인들과 함께 요의 미술양식이 유입되면서 고려의 장의미술에 적극적으로 반영되었다. 고려의 묘지석과 석관에는 요대 장의미술에서 볼 수 있었던 문양과 도상들이 새겨지기 시작하였는데, 이에 따라 1144년의 허재 석관에는 처음으로 인신수관형 십이지 도상이 등장하게 된다. 허재 석관의 십이지 도상은 사신도 도상과 함께 배치되어 있어 도교적 법식을 보여주는 듯하면서도, 아직까지 도상의 양식에서 불교의 영향력이 뚜렷하기에 고분벽화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단계로 볼 수 있다. 개풍 수락암동 고분벽화는 십이지 도상이 표현된 가장 이른 시기의 고분벽화로 1200년 전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북벽의 중앙에 子像이 아닌 卯像이 위치하고 있어 장의미술 내의 십이지 도상이 보여주던 전통적 법식과는 다른 구성으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중국 고분벽화에서도 전례 없는 회화적 풍모를 띠고 있는데, 이는 송대 도교 인물화에 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장단 법당방 고분벽화의 십이지 도상은 사신 도상이 제거되고 십이지 도상만이 확대되어 벽면에 그려지면서 중심 주제만을 부각시키는 벽화 구성의 변화를 보여준다. 1352년경 조성된 파주 권준묘 벽화의 십이지 도상 역시 이러한 변화된 구성을 따르고 있는데, 북벽의 인물과 그 양 옆에 위치한 두 인물을 마치 삼존상처럼 앉은 자세로 표현하고 있어 도교·불교의 습합적인 현상을 드러낸다. 1372년경 조성된 공민왕릉 벽화와 병풍석의 십이지 도상은 회화와 조각이라는 매체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양식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요대풍의 조각 양식을 연원삼아 새로이 등장한 조각적 성격의 십이지 도상으로 판단된다. 이에 따라 공민왕릉 벽화의 십이지 도상은 소략한 기법을 통해 정면상으로 표현되었고 기존의 회화적 풍모는 사라졌으며, 채색에서 오방색을 사용하고 있어 성리학적 오행론의 대입을 파악할 수 있지만 본래의 도교적인 의미는 감지하기는 힘들어졌다. 조선 초기 1456년에 조성된 원주 동화리 노회신묘 벽화에는 사신도 도상이 벽면의 중심에 재등장하였고, 사신도 도상의 하단부에 비교적 작은 크기로 십이지 도상을 표현하였다. 기본적으로 공민왕릉 벽화의 십이지 도상과는 형태와 제작 기법에서 유사한데, 이는 부장품으로 제작되었던 십이지용의 역할을 대체하기 위해 그려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왕릉의 병풍석에는 공민왕릉 병풍석의 십이지 도상이 그대로 계승되지만 십이지를 인격적 성수신으로 상정했던 본래의 도교적 의미가 잊혀지면서 십이지를 구체적인 형상의 인물으로 표현해야 할 필요성이 없어짐에 따라 자연스레 표현이 투박해졌고, 문양화되는 경향을 거쳐 결국에는 십이지 문자로 대체된다. 고려시대 고분벽화의 십이지 도상은 종교회화를 모본삼아 제작되었기에 쇠퇴하던 동시대 중국의 고분벽화보다 회화적으로 뛰어난 수준을 보여주었으며, 도교적 도상들과의 조합을 통해 석실 안을 온전히 도교적인 세계관으로 구성해냈다. 벽면에 중심 주제인 십이지 도상을 단독 배치하는 방식으로 변화한 것은 일종의 토착화를 이룬 것으로, 후기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 배치에서 볼 수 있었던 주제 부각의 방식을 계승한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 고분벽화의 십이지 도상이 지닌 의미와 형태는 조선시대의 변화된 사상과 세계관에 의해 점차 왜곡되다가 소멸된다. 그러나 왕조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도상을 계승·변용하여 장의미술에 적절하게 적용한 점은 의의가 있으며, 도상의 실물을 오늘날까지 제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미술사적 연구 가치는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免费论文题目: